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19년 ‘3.1운동’은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자 이후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전체 인구 가운데 노동자 수는 많지 않았으나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들끼리 또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다. 운동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투쟁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1919년 3월 9일 오전에 시작한 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3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업에서 빠져나가 전차를 몰던 운전수를 폭행하고, “왜놈에게 혹사되면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속히 자살하라”는 선전문을 뿌리며 곳곳에서 전차에 돌을 던지고 운행을 방해하였다. 서울에서 평상시 운행하던 58대 가운데 무장한 일본군이 동승한 19대만이 운행되었다. 26일에는 20량의 전차가 시위대에 의해 대파되었다.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거의 중단되었을 때도 노동자들은 공장 단위로 분산적인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3월 10일 이후 서울에서는 노동자가 평상시의 10% 정도밖에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1919년 3월 22일 남대문역 부근 만세시위 기소자(정병욱, 낯선 삼일운동, 역사비평사)
1919년 3월 22일 남대문역 부근 만세시위 기소자(정병욱, 낯선 삼일운동, 역사비평사)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3월 22일 노동자 조직인 ‘노동회’(노동대회)가 주도한 ‘노동자대회’였다. 남대문 근처에서 노동자 200-300명 포함 군중 8백 명이 ‘노동대회’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주로 운수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의 시위행진은 한동안 잠잠하던 시위운동에 불을 붙였다. 23일에는 새벽부터 훈련원, 동소문, 미생동, 원효로, 창덕궁 등 시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7일에는 철도기관수 차금봉이 주도하여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 들이 시위에 나섰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만철경성관리국의 조선인 노동자 900명 가운데 85명의 탈락자를 빼고 800여명이 참가하였다. 노동자들은 서울역 앞에서 파업시위를 벌였다. 파업은 3월 31일까지 5일간의 계속되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던 차금봉은 뒤에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활동을 거쳐 1928년 노동자 출신으로 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1929년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철도노동자들의 시위를 이끌고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활동을 거쳐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차금봉 조서
1919년 3월 27일 철도노동자들의 시위를 이끌고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활동을 거쳐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차금봉 조서

지방에서도 노동자들이 만세 시위에 나섰다. 3월 7일 평북 운산군 북진에 있는 동양합동광업회사 노동자 시위, 3월 15일에는 평북 의주군 고창면의 조선총독부 광무과 출장소 노동자 시위, 3월 20일 회령 지역의 노동자 시위, 3월 20일.28일.4월 3일 천안군 직산금광회사의 광산노동자 시위, 4월 5일 강원 통천군 고성의 노동자와 농민 시위, 4월 8일 10일 경남 동래군 기장의 노동자와 가족 시위들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운동 뿐 아니라 공장을 멈추는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에 동참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들은 84건의 파업을 벌였으며 9011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은 92%인 8,283명이었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면서 내세운 요구는 83%가 임금인상이었다. 8시간 노동제 요구도 이미 1919년 노동자 파업투쟁에서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물가는 뛰고 실질임금은 낮아졌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세계에서도 기아임금으로 소문났던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반도 못 되는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으로 시달렸다. 생존권이 위협받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면서 3.1운동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공장 기계시설 파괴, 일본인에 대한 폭력행사, 항의 연설회, 시가행진, 동맹파업, 태업, 진정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요구는 3.1운동의 여래 흐름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루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으며, 1919년 4월 11일 새벽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주의’를 내세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민국으로 정했다. 임시정부가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서는 세계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헌법에 천명하였다.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을 명시하였다.

3.1운동은 무장 독립운동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참가자 들 가운데 일부는 비폭력 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단체에 들어가 무장항쟁에 나섰다.

1919년 3.4월을 어떻게 경험했고, 경험한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했는지에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이 삶과 실천이 달라졌다. 3.1운동 과정에서는 억눌리고 빼앗기고 무시당하던 ‘무지렁이 백성’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계기로 3.1운동 이전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실천하던 사회주의자들과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인 활동가들은 노동자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 권력과 제국주의 지배를 용인하는 타협적.개량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학습하고 조직하면서 함께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3.1운동을 겪고 난 뒤 1920년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이러한 사회주의운동과 짝을 같이하면서 발전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기 노동자들의 역할과 노동운동의 방향을 보여주는 1925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만평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기 노동자들의 역할과 노동운동의 방향을 보여주는 1925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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