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1974년에 제작된 로만 폴란스키의 필름 누아르 <차이나타운>.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걸작이지만, 한편으론 50여년을 앞질러 기후위기 시대의 풍경을 정확히 예시해주고 있다. 좋은 영화는 시간을 관통한다.

<차이나타운>은 오일쇼크와 환경 위기 담론으로 점철된 70년대의 자장 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를 비롯한 생태와 기후위기 담론이 매스미디어에조차 격렬히 개진되던 때. 영리하게도 필름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빌려, 자본주의가 어떻게 환경과 공유재의 권리를 사유화하며 도시를 짓고 부를 축적했는지 그 속살을 과감히 묘사한다.

가뭄에 시달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한 사설 탐정(잭 니콜슨)에게 아름다운 유부녀(페이 더너웨이)가 남편의 실종 사건을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수도를 장악한 소수의 부자들이 LA 대도시로 물을 공급하느라 수로를 변경하고 농촌과 농부들의 물과 토지를 강탈하는 내막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물을 배급하려던 사위를 살해하고 딸을 강간한 부자 아버지가 추악한 자본가의 초상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이 시나리오는 1900년대 초 미 서부 대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자본가가 상수도 공급권을 장악하며 부를 축적했던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고증하고 있다.

<>
<>

그런데 타락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미 서부 대도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차이나타운>의 비판은 기이하게도 지금 이 시대에 한층 더 주효하다. 현재 1,200년 만에 대가뭄을 겪고 있는 미국 서부. 여전히 '물'과 같은 공유재와 에너지를 소수 자본가들이 돈벌이로 사유화하고 있고, 또 농부들은 농업용수 때문에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지적인 영화는 반세기 시간의 단층을 횡단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현시한다. 과연 물은 누구의 것인가?

"다가오는 물 위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이 세계에 타전한 메세지다. 현재 23억이 물 부족 국가에 살고, 7억 3300만명이 물 취약 국가에 거주한다. 그 중 절반이 어린이들이며, 매일 77명 이상의 5세 어린이가 물 부족, 물 위생 문제로 사망한다.

기후위기는 정확히 물 위기다. 지구 기온이 1도 상승하면 대기 수분은 7% 증가한다. 한쪽에선 가뭄 판데믹이, 다른 쪽에는 집중호우와 홍수가 발생하는 이유다. 점점 더 물의 흐름이 혼돈의 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6월 현재 유럽, 파키스탄, 미국, 아프리카 등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반면에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은 홍수재난으로 수백만명이 고립되어있다.

물이 부족하니 덩달아 단속도 심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잔디밭에 물을 주거나 세차하는 것이 제한된다. 이탈리아 북부를 비롯 유럽 일부에서도 세차가 제한되고 분수 물 공급이 중단됐다. 어기면 500유로 벌금이 부과된다. 작년 이란에선 물 시위 때문에 보안군 총격으로 1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떨까? 1인당 이용가능 수자원량이 세계 153개 국가 중 129위. 2021년 환경부 보고서 내용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00㎜로 세계 평균의 1.6배이지만 인구밀도로 인해 1인당 연 강수총량은 평균의 1/6밖에 되지 않는다. 물 부족 국가는 아닐지언정 물 스트레스 국가가 맞다. 여기에 기후위기가 가속되면서 가뭄 기간이 3.4배 증가했다. 담수량이 줄고, 농업용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설상가상 2022년 봄, 역대 최악의 가뭄이 발생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에는 역사상 가장 큰 산불이 났다. 농민들은 타들어가는 농작물 앞에서 한숨을 쉬었고, 섬 지역 주민들은 식수 부족을 겪어야 했다. 2022년의 고통스러웠던 봄 가뭄은 향후 펼쳐질 위기의 전초전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은 '다가오는 물 위기'에는 안중에도 없이 물을 펑펑 쓰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이 유럽 평균의 두 배다. 독일이 127ℓ, 덴마크가 131ℓ, 반면 한국은 280ℓ.

이 대책없는 무감각, 폭주하는 소비의식을 '골프 열광'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작은 땅에 골프장만 500개 이상. 세계에서 8번째로 가장 많다. 일말의 자성도 없이 골프장은 계속 늘어나고, 온갖 골프 예능과 이벤트들이 난립한다. 골프장 1개는 대략 하루에 1천톤의 물을 소비한다. 일반적인 골프 코스 하나가 6만명의 식수를 허비한다. 인근 지하수와 농업용수가 고갈될 수밖에 없다. 생태계 파괴, 탄소배출과 살충제 남용도 지독하다. 도시인들을 먹여 살리는 농부의 논밭은 말라가는데, 도시 중산층의 우아한 스포츠를 위해 물을 흥청망청 쏟아붓는 이 그로테스크한 비대칭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와중에 엊그제 워터밤 물 축제가 강행됐다. 시민들 비판은 아랑곳없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자제를 권고했던 싸이의 '흠뻑쑈'를 옹호하기 위해 보수 글쟁이들은 소수 SNS 유저들의 목소리가 과대표되었노라 투덜거린다. 혹은 저렴한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이라고 비하한다. 물이 귀해졌다는 말을, 저기 농촌은 지독한 가뭄인데 함부로 물을 쓰는 게 맞냐는 질문을 기껏 성가신 소수의 목소리로 단죄하는 저 푸른 골프 코스같이 우아한 말들.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내 돈으로 물을 사서 내 맘대로 배급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큰소리를 치던 타락한 자본가의 말과 다른 게 있을까.

달리 한국이 기후악당, 생태악당이 아닐 것이다. 물과 같은 공유재에 대한 감각의 부재, 기후위기에 대한 감각의 상실, 위기를 함께 극복하려는 시민윤리의 결핍이 '내 돈으로 내 물을 사용한다는데'와 같은 민영화된 세계의 파편적 리액션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내돈내산'은 한국형 능력주의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그 돈이 얼마나 많은 공유재를 훼손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방관하면서 발생했는지를 짐짓 모른 체하는 불로소득의 정념이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앞으로 심화될 가뭄과 홍수에 대한 기후 '적응'과 '회복'에 대한 국가 정책과 시민 담론조차 거의 전무한 형국이다.

버린 물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바닥에 버린 시민윤리가 중요하다. 이웃을 염려하고, 세계를 걱정하는 말들이 그렇게 고까웠나. 함께 나누자는 말이 경멸당하는 세계란 도대체 얼마나 흉포한가.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