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갓난아기에게 울음은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이다. 아기의 울음소리 하나로 대개 엄마들은 아기가 졸린 건지, 배가 고픈 건지, 기저귀를 갈 때가 됐는지, 아픈 건지 등을 알아차린다. 의사소통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만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엄마라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엄마는 그만큼 아기에게 귀를 기울인 시간이 많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기의 필요에 응답해왔을 뿐이다. 주 양육자가 엄마가 아닌 경우엔 주 양육자가 그렇다. 아기의 요구에 얼마나 민감한지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돌본 시간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인과의 의사소통은 어떨까? 필자는 장애인들의 의사소통 보조를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었는데, 한 번은 몹시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장애운동 집단의 전국 단위 회의에서였다. 나와 입장도 다르고 심지어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A의 발언은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옮기고 있는데, 나와 같은 입장이면서 훨씬 친하다고 여겼던 S의 발언은 내가 알아듣질 못해서 자꾸만 되묻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언어장애의 정도도 비슷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A는 나와 활동하는 지역이 같았고, S는 달랐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거리와 무관하게 전국 단위 회의나 집회에서 가끔 만나는 사이보다는 활동 지역이 같아서 자주 만났던 사람의 언어에 내가 훨씬 익숙했던 것이다.

장애 유형이 같아도 언어장애는 사람마다 다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난감했다.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해서 다시 말해달라고 해야하는 건지, 내가 알아들은 몇 마디로 대충 이해하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건지. 친한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한 친구가 대답했다. "당연히 다시 물어봐야지. 못 알아들었으면서 이해한 척하는 거, 진짜 짜증 나." 몇몇 친구들이 공감을 표시했고 나는 평소 내 태도가 맞았다고 '으쓱'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럼 니네는 몇 번이나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게 하는 건 짜증 안 나냐?" 그러자 친구들의 의견이 갈렸다. 나는 놀랐다. 형편없는 내 인권감수성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장애인들도 다 다른 건 당연한 건데, 모든 장애인이 똑같은 '정답'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한편, 나는 오래전 캐나다 여행에서 한 친구를 사귀었다. 그녀는 여성과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고 내 영어는 짧았다. 번역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정말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고, 다시 말하고, 표정・몸짓・그림을 동원해 말하고, 사전이나 인터넷을 찾으며 말하고, 서로의 발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만났지만, 나는 그녀가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스무 살이라는 것을 내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날에야 알았다. 내가 놀란 건 그녀의 나이가 아니라 우리의 소통에 나이가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한국인이었다면, 우리의 대화 양상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토록 애써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한국 사람은 모두 같은 말을 쓰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그렇지 않다. 인권교육 시간에 '나만의 가치 사전 만들기'라는 활동을 해보면, 참여자들은 똑같은 단어에 전혀 다른 뜻, 심지어 정반대의 뜻을 적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에게 '배려'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물어봐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을 두고 쌓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주주의'는 '다수결'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소외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생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말만 다루는 '대화법'이나 '대화의 기술'을 배운다고 과연 소통이 잘 될까?

그렇다면 결국 말을 하든 못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언어가 같든 다르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의사와 필요에 감응하는 노동을 피차에 얼마나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보고 또 보고 살피는 '보살핌', 돌아보고 끊임없이 돌아보는 '돌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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