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호주 헌터스 힐의 덤불숲(Kelly's Bush)은 백인 정착지 옆에 딸린 미개간지였다. 주머니쥐와 토종 조류가 서식하고, 오래된 원주민 건물들이 자리하는 숲. 지역 시의원들은 진드기 투성이의 쓰레기장이라며 허투로 취급했다. 그러다 1971년 시 당국이 이곳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인근에 살던 전업주부들이 개발에 반대했다. 부자들의 고층 아파트를 짓느라 풍요로운 공유지를 파괴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그들은 유력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장은 '13명의 피의 주부들'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낙담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하소연한 곳은 건설노동자연맹 Builders Laborers Federation(BLF). 의외의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13명의 피의 주부들은 공산당 출신의 연맹 지도자를 만났다. 잭 먼디 Jack Mundey였다.

잭 먼디. 
잭 먼디. 

이 역사적 만남은 노동운동과 생태-환경운동의 시초적 마주침으로 평가된다. 잭 먼디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격론을 벌인 끝에 숲 보호를 결정했다. 시 당국이 공사를 강행하자, 건설노동자연맹은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그 지역 대다수 건설 노동자들이 연맹 소속.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3명의 주부들과 노동자들이 덤불숲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녹색 금지령 Green Bans'이 탄생됐다. '블랙 금지령'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지켜내는 거라면, '녹색 금지령'은 무분별한 환경 파괴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우리가 오염되고 무계획적인 도시에서 질식해 죽는다면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우고 있고, 만일 그게 성취된다고 해도 여전히 이 도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질'은 결코 진부한 표현이 되어선 안 됩니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잭 먼디와 BLF는 71년부터 74년까지 42개의 '녹색 금지령'을 지정했다. 당시 돈으로 50억 달러 규모였다. 미국 금융이 물밀듯이 들어와 해안가에 부유층의 고층 아파트와 유흥시설을 짓던 시절. BLF는 원주민들과 보호지를 지켜냈고, 고속도로 난개발에 저항했다. 또 문화 유산과 공원을 지켰다. 단순히 중산층의 환경보호 담론을 답습한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을 노조와 지역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통해 재영유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의 노동은 건설자본의 이윤 축적 수단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공주택처럼 시민의 필수적인 공간들을 위한 질료라 여겼다. 자신들이 짓는 도시가 공공의 풍요와 필요를 위해 존재하기를 바랐다. 잭 먼디는 그걸 '노동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개념화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유해한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임금과 노동조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노동의 사회정치적 역할까지 고려한, 더 나아가 자본주의 노동이 야기하는 생태 문제와 공공성의 침해까지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이른바 '사회적 노동조합주의'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또한 BLF은 여성 연구과정을 지원하면서 시드니 대학에 금지령을 내렸고, 게이 학생을 퇴학시킨 맥쿼리 대학에는 '핑크 금지령'을 때렸다. 녹색 금지령 운동은 건설노동자를 중심으로 원주민, 여성, 성소수자, 퇴거자, 빈민 등이 도시 공간을 생태적이고 민주적인 형상으로 전유하려는 급진적인 연대운동이었다.

당연히 좌우파 모두 잭 먼디와 BLF의 녹색 금지령 운동을 증오했다. 친소련파와 친중파로 갈라진 당시의 진부한 주류 좌파들에게 BLF의 시도는 변절처럼 여겨진 반면, 자본과 정부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눈엣가시였다. 1974년 언론사들은 비난 기사들을 쏟아냈고, 건설 기업, 부패 정치인, 갱단, 경찰이 똘똘 뭉쳐 잭 먼디와 활동가들을 BLF로부터 축출했다. 80년대 이후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노사관계법이 바꾸게 되면서 노동의 힘이 현저히 떨어지게 됐다.

그럼에도 '녹색 금지령 운동'은 굵은 고딕체로 여전히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록스와 센테니얼 파크 등이 살아남아 시민들 휴식 장소를 제공하고 있고, 호주 환경법과 유산보호법, 도로교통법의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독일 녹색당이 탄생되는 데 많은 영감과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잭 먼디는 한국 용산참사 때 응원 메세지를 보내는 등 다채널로 끊임없이 국제연대를 모색했다. 심지어 2016년엔 노구를 이끌고 시드니 해안가의 유적물을 사유화하려던 기업을 녹색 금지령으로 내쫓았다. 2020년 잭 먼디가 사망한 이후에도, BLF는 난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자유당 정부에 맞서 녹색 투쟁을 지속했다.

한편, 2021년 COP26 인민 회담에선 제레미 코빈과 여러 패널들이 잭 먼디의 궤적을 성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녹색 금지령 운동이 기후위기 시대에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는 거였다. 사람과 지구 생태를 해치지 않는 '좋은 일자리'를 구축하는 것의 의미, 그 체제 전환의 가능성의 씨앗 말이다.

잭 먼디와 녹색 금지령 운동을 다룬 수많은 다큐와 영상 중 가장 최근에 제작된 다큐 <잭 먼디의 삶과 정치>는 럭비 선수를 지망했던 평범한 노동자가 공산당과 건설노동자연맹을 경유하며 호주 노동운동의 전설이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현한 작품인데, 그 안에서 노회한 잭 먼디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술회한다. '사회주의와 생태주의의 융합'. 요컨대 미래는 건설하는 자의 몫이며, 우리를 파괴하는 것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큐 <잭 먼디의 삶과 정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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