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멸종된 줄 알았던 미국적인 미국영화를 만났다."

여기에서 가장 미국적인 영화란 <탑건 : 매버릭>을 말한다. 모 지면에 실린 영화 칼럼의 한 문장. 또 어느 평론가는 '최근 블록버스터들이 앞다투어 유행처럼 다루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찬했다. 칼럼 지면뿐 아니라, 국내 개봉 후 관객의 상당수는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얼룩이 묻지 않았다며 기이할 정도로 열광적 환호를 보냈다. 나무위키의 이 문장은 환호의 절정을 이룬다.

"억지로 정치적 올바름을 넣는 것이 아닌 탑건이라는 영화의 본질에 집중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환호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이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마블 시리즈를 비롯한 헐리우드 영화들과 넷플릭스 콘텐츠들이 인종, 성, 정체성과 같은 이슈들을 작위적으로 끼워 넣는 걸 의미할 테다. 그런데 이들 태반은 <탑건 : 매버릭>이 다른 의미에서 고도로 정치적인 영화라는 걸 무시한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톰 크루즈와 주연들이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여러 대의 전투기가 극장 위를 포효하듯 날아갔다. <탑건 : 매버릭>의 초청상영을 축하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톰 크루즈는 화답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때, 아랍 지역의 영화인들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한 영화 저널리스트는 나중에 알자리라 기고문에서 당시 엄폐물을 찾아 몸을 피했다고 술회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영화 제작자들도 얼결에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를 들어, 미국뿐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북반부의 관객들이 '아날로그 액션씬'으로 추앙하는 그 전투기 씬을 아프간, 예멘, 이라크 등의 중동 지역 관객들이 보았다면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톰 크루즈가 탑승한 초음속 전투기를 직접 설계한 군산복합체 기업 '록히트 마틴'의 로고, 세계 도처에 비참한 파괴를 야기해왔던 그 유명한 전투기들의 상징 때문에.

1986년의 <탑건> 자체가 냉전 체제와 미 군산복합체의 산물이다. 미 국방부는 1920년대부터 군을 홍보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헐리우드와 협력해왔다. 70년대 반전운동의 여파로 뜸했다가 레이건 시대가 되면서 군국주의 영화들이 다시 활발히 제작된다. 미군은 <탑건>의 시나리오 단계부터 협력했고 군 물자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뿐더러 아예 극장 앞에 공군 부스를 마련하고 신병을 모집했다. <탑건>의 성공 이후, 헐리우드 군국주의 영화들은 4배로 늘어났다.

물론 35년만에 제작된 <탑건 : 매버릭>은 '불량국가'의 정체성을 특정하지 않고, 전쟁 관련 대사들을 절제하는 등 군국주의 잔재를 지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빈약한 시나리오에 비해 장르적 뚝심을 밀고 나간 덕에 매끈한 오락영화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 국방부와 공군은 속편 제작에 열렬히 참여했고, 개봉 후엔 신병 모집 광고를 극장에 내걸었다. 미 전투기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홍보효과가 있는 탓이다. 그러고 보면, 예의 그 평론가가 말한 '미국적인 미국영화'가 정확한 표현이다. 제국의 영화로서 말이다.

포스터. 

공교롭게도 <탑건 : 매버릭>에 가장 열광한 이들도 미국 우익들. 폭스뉴스와 저명한 우익 인플루언서들이 치어리더를 자처했다. 극우의 슈퍼스타 벤 샤피로는 국가와 국제질서를 보호하는 잘생긴 남자들의 '애국적 영화'라 추켜세웠다. 언젠가 쿠엔틴 타란티노는 <탑건>에서 애국주의를 빼면 반나체 미남들의 '동성애'만 남는다고 평했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미 우익들은 여전히 애국심 충만한 눈을 반짝일 뿐이다. 속편은 현실의 정치적 갈등을 배제하고 인공적인 공간과 시간을 배경 삼고 있지만, 남성호르몬과 석유, 전쟁과 로맨스, 오토바이와 고독 등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장치들이 우익의 심장을 공습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이렇게 평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묻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가."

아마도 우리 시대에 떠도는 유령 중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일 것이다. 거칠게 소묘하자면, 이 시대의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서구 리버럴의 강박증에 가깝다. 6, 70년대 사회문화적 격변을 지나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불평등에 포커스를 맞추는 대신, 재현의 수준에서 성평등이나 인종 문제의 표피적이고 지엽적 부분만 정밀하게 부각하며 진보를 참칭해왔던 일련의 정치적 전략. 정치적 올바름이 횡행하는 동안 길거리에서 살해되는 흑인들은 더 늘어났고,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계속 제자리였다. 심지어 현재 8명의 억만장자가 지구의 부의 절반을 차지하는 끔찍한 불평등의 세계로 변모했다.

달리 말해,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표피의 정치다. 세계의 연결됨과 교차성이 분할되고 조각난다. 그 동안 서구의 재현 매체들은 이것저것 정체성 지표를 끌어모아 구색을 맞추는 이른바 '토크니즘 Tokenism'에 천착했다.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캐릭터를 돌림판 돌리듯 무작위로 배치하는 이 표피적 재현이 개연성과 리얼리즘의 상실을 양산해온 게 사실이다.

구멍난 개연성과 이 표피의 위선 속에서 자연 우익의 언어들이 자랄 수밖에 없다. 트럼프에서부터 곧 이탈리아 첫 여성총리가 될 극우 조르자 멜로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올바름의 위선은 우익들의 먹잇감을 제공해왔다. 심지어 일부 좌파들도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며 '노동중심성'을 내세우거나 사회운동을 또 다시 위계화한다. 우익이든, 노동중심성을 주장하는 자칭 좌파든, 정작 그들이 비판하는 정체성 정치의 또다른 판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퇴행적이다.

반대급부로 전통적 가치, 애국심, 핍박 받은 백인, 노동중심성 따위의 일괴암적 정체성을 제시하며 권력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국내 진보정당 내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한답시며 노동중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친민주당 성격을 드러내는 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선 조각난 세계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그 연결됨과 교차성을 총체적으로 사유하고 얽혀 있는 뿌리들을 부지런히 탐색하는 것. 노동, 젠더, 남반부, 인종, 기후생태 문제가 실은 떼려야 뗄 수 없이 다면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자각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포획된 운동의 문제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표피에 머무르지 않고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는 급진적인 젠더, 노동, 퀴어, 인종정의, 기후정의 운동들이 절실한 이유다.

가장 정치적인 <탑건>을 향해 정치적 올바름이 없다고 찬사를 보내는 이 엉망진창 이율배반의 세계. 우리는 조금 더 맑게 눈을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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