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미드 한 편이 있다. <시녀 이야기 The Handmaid's Tale>. 안 보셨을 것 같다. 공사다망하고 그 신실한 신앙심에 견줘봤을 때 보셨을 리가 없다. 그래도 세계적인 화제작이고 명색이 한 나라의 국회의장이시니 위정자의 무지를 걱정하는 시민의 도리로서 친절하게 줄거리를 읊어 드리면. 

1985년 마거릿 애트우드의 SF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이 드라마는 2017년 시즌1이 공개되자마자 OTT 역사상 처음으로 에미상을 휩쓸고 곧장 전 세계에서79관왕을 거머쥘 정도의 뛰어난 완성도로 화제를 끌어모았다. 

시녀 이야기 The Handmaid's Tale
시녀 이야기 The Handmaid's Tale

먼 미래, 환경오염으로 출생율이 급감하자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미국을 장악하고 길리어드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든다. 곧장 출생율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여성들이 엘리트들의 시녀로 배정돼 강제로 강간당하고 아이를 출산하는 지경에 이른다. 시녀였던 주인공 준 오스본이 이 잔혹한 가부장 체제에 반기를 드는 과정이 드라마의 줄기. 며칠 전 시즌5가 막 종영했고, 이제 피날레 시즌을 앞두고 있다. 

SF장르를 빌려 가부장제와 여성의 부정된 재생산 권리를 고발하는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여성들의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드라마가 됐다. 미국, 동유럽, 남미, 최근의 이란 히잡 시위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속의 시녀 복장인 흰 모자와 빨간 망토를 그대로 모방한 코스프레 시위가 널리 퍼져나갔다. <시녀 이야기>의 현재성을 증거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21세기 들어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공격하는 극우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불길한 상황의 방증이기도 하다. 낙태권을 비합법화한 미국과 폴란드의 대법원에서부터 공공연히 여성혐오를 전시했던 전 브라질 대통령 보우소나루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지금, 가부장제와 파시즘이 뒤섞여 파도치는 신권위주의의 격랑 속에 흔들리고 있다. 

최근의 신권위주의는 러시아와 동유럽, 또는 이탈리아 정권을 잡은 극우 세력처럼 ‘전통적 가치’라는 깃발 아래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가 하면, ‘인구 감소’를 핑계로 재생산 권리를 축소하기도 한다. 이런 반여성적 기조는 필연적으로 성소수자 억압과 징벌을 동반한다. 여성을 그저 ‘임신 기계’로 격하하는 체제는 인구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성소수자들을 이기적인 잉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멀게는 유럽 전역을 휩쓴 마녀사냥이 그랬다. 흑사병 판데믹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이 막 구성되던 시기였다. 인구 압력 속에서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축소하고 임신 도구로 환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격이 펼쳐졌다. 당시 성소수자들도 불길 속에, 또는 바다 속에 던져졌다. 이 폭력의 구조를 아예 시스템으로 설계한 게 20세기 초반의 나치즘이다. ‘흙과 피’, ‘생명’, ‘민족’, ‘인구의 번영’을 앞세운 민족운동(Völkisch movement)을 토대로 세력을 확장한 나치즘은 여성을 게르만 민족의 생산자로 주체화하는 한편, 수많은 게이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했다. 

<시녀 이야기>의 초반에도 같은 풍경이 등장한다. 씨받이로 끌려가는 여성들, 교정과 치유 명목으로 강간당하거나 수용소로 이송되는 레즈비언들, 죽음을 피해 국경을 넘는 게이들.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백래시로 점철된 근자의 신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들 속에서 이 드라마가 하나의 구호로 재현되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생명’, ‘인구’, ‘전통 가치’, ‘종교 근본주의’라는 명목의 역사는 곧 폭력과 통제의 역사다. 

얼마 전 국회의장 김진표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나경원이 국회에서 ‘인구와 기후 문제’를 논했다. 그 자리에서 김진표 의장은 인구 문제 해법으로 ‘동성애 치유운동’을 거론했다. 동성애자를 치유하는 것으로 인구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김진표가 말한 동성애 치유는 ‘전환 치료’다. 20세기 초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 있다는 기이한 믿음 하에, 톱으로 게이의 뇌를 썰어 전두엽을 절개했던 게 전환 치료의 시작이었다. 이후에 전기 충격, 약물 치료로 변환되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각에서는 레즈비언 ‘교정강간’이 유행했다.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앨런 튜링도 게이라는 이유로 자택 감금과 약물 치료를 받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과학계에서는 사망 선고를 내린 지 오래지만, 지금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푸닥거리와 사이비 정신상담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존재에 대한 폭력, 그게 바로 동성애 치유다. 

지난 세월 김진표는 민주당 내에서 차별금지법을 가장 강력히 반대해왔던 인물. 어찌나 신앙심이 깊은지 공과 사의 구별도 형해화하고 마치 한국이 신정체제인 양 자신의 교리를 정당정치에 무던히도 투사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국회의장이 돼 인구 문제를 해결하자며 저 끔찍한 ‘동성애 치유운동’을 공공연히 입에 올린 것이다. 

최근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 우세의 하원이 구성되기 전에 ‘동성결혼 존중법’을 재빠르게 통과시켰다. 백래시에 대한 안전망을 만든 거였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당은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을 끊임없이 유예시켰고, 공적 망언을 지속적으로 발신하는 혐오대장 김진표를 국회의장에 앉혀 놓았다. 김진표는 결국 민주당의 복심인 건가. 

그렇게 국회에서 연출된 저 괴이쩍은 대담에는 ‘여성’과 ‘동성애’가 지워져 있다. 대신 ‘저출산’과 ‘인구’가 자리한다. 반동성애 교설에 잠식된 김진표의 두뇌는 지금 현재 80억에 다달은 지구 인구 문제를 가늠할 능력이 없다. 15년 정도가 지나면 무려 90억에 이른다. 세계에는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존재하지만 인구는 마냥 폭발 중이다. 

가난한 남반구 인구는 과잉이라 단죄하고, 뒤돌아서서 자국의 인구 감소는 큰일이라고 앓는 시늉을 하는 북반구 자본주의. 생산력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아이를 낳으라 닦달하며, 인구가 감소하면 곧 우리의 삶이 끝날 것처럼 매일 독촉장을 발급한다. 인간을 ‘사람’이 아니라 ‘인구’로 계량하는 사회, 사람을 재화와 서비스 단위로 파편화하는 사회, 여성을 사람이 아니라 출산 기계로 강등하는 사회, 그리고 출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교정하자는 사회. 

바로 그렇게 사람 대접을 하지 않는데 과연 누가 애를 낳고 싶겠는가. 인구가 아니라 사람, 성장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시야의 좌표를 바꾸면 저 기득권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인구 감소 문제가 누구를 위한 걱정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한한 생산, 무한한 인구, 그게 곧 기후위기의 원인이라는 것도 모르는 저 무지한 두 명이 국회에 앉아 동성애 치유운동이나 지껄이고 있는 게 바로 한국의 치명적인 문제일 것이다. 진실로 인구와 기후가 걱정인가. 그러면 얼른 국회의장직을 관두고 사라지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집에서 푹 치유하면서 저 강추 드라마나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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