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서 속사포(조진웅 분)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할 때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는 혈서를 남겼다. 암살단에 참가한 뒤 부상당한 몸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겠다며서 “내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요”라고 했다. 생명과 자존의 근거로 내세운 것이 ‘학교’였다. 일제 강점기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이 한 번 쯤 가고 싶어 한 학교가 흔히 ‘모스크바 공산대학’이라고 부르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었다.
그 학교 출신들 대부분이 학교에서 배운대로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이재유는 세 차례 일제의 감옥에 갇혀 12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끈질기게 옥중투쟁을 벌였다. 감옥에서도 옥중투쟁을 계속하던 이재유는 일제의 고문과 영양결핍으로 얻은 폐결핵, 각기병으로 1944년 10월 26일 41살 나이로 옥사하였다. 최하층 노동자들과 만나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려고 했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1980년 5.18민중항쟁 때 ‘들불야학’ 출신들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았고 가르침과 배움을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다가온 1980년 ‘민주화의 봄’은 마냥가지 못하였다. 신군부의 꼭두각시 같은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군인들이 주요 대학을 점령하여 병력을 주둔시켰다. 학생운동 지도부,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정치인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전국이 숨죽이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학생, 시민, 노동자들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 계엄군은 진압봉과 대검을 휘두르고 군홧발로 짓밟으면서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에 나서 처참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5월 18일은 ‘피의 일요일’이었다. 5월 20일 오후가 되면서 10만에 이르는 인파가 금남로를 메웠다. 오후 7시쯤 운전기사들이 200여 대의 버스와 택시에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들어섰다. 차량을 앞세워 계엄군을 밀어붙였다. 5월 21일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오후 1시 정각 계엄군은 도청에서 애국가를 틀어놓고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였다. 시위대가 예비군 무기고와 파출소를 열고 카빈총과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여겼다.
들불야학 출신들은 5월 21일부터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소식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투사회보’였다. 처음에는 야학 활동을 하던 광천동성당에서 만들었다. 5월 25일 부터는 YWCA로 옮겨서 작업했다. 윤상원, 박용준, 전용호, 동근식, 김성섭, 나명관, 윤순호, 김경국, 정재호, 이영주, 박용안, 오경민, 노영란, 조순임 등이 참여했다.
5월 23일 수습대책위원회는 무장을 해제하고 협상하자는 ‘투항파’와 희생자들의 피에 보답하려면 무기를 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투쟁파’로 나뉘었다. 5월 25일일 3차 시민 궐기대회에서 투쟁파의 주장이 지지를 얻어 오후 10시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결성하였다.
위원장 : 김종배(25세, 조선대 무역학과 3년)
내무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26세, 조선대 2년)
외무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30세, 전남대 법대 졸, 보성기업 영업부장)
대변인 : 윤상원(29세, 전남대 정외과 졸, 들불야학 강학)
상황실장 : 박남선(26세, 골재 차량 운전사)
기획실장 : 김영철(32세, YWCA 신협 이사, 광천동 빈민운동)
민원실장 : 정해직(29세, 교사, 흥사단 아카데미 회장 역임)
조사부장 : 김준봉(21세, 고려시멘트 직원)
보급부장 : 구성주(25세, 건재사 근무)
새로운 항쟁지도부로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중요한 역할을 맡은 대변인 윤상원, 기획실장 김영철, 홍보부장 박효선이 들불야학의 교사들이었다.
22일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던 ‘해방광주’를 만들어 내었다. 물론 광주 외곽을 둘러싼 계엄군에게 포위된 불안한 해방이었으나, 광주 시민들은 수만명이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 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스스로 의견을 내세우고 토론하면서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하였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하나 탈취된 곳이 없었다.
5월 26일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오후 6시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쟁지도부는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처들어오고 있습니다”하는 가두 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새벽 4시가 지나면서 계엄군이 쏟아내는 총소리가 광주를 울리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폭도 소탕작전’이 자행된 것이다. 도청이 함락되면서 열흘 동안 전개된 ‘5.18민중항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광주를 진압한 신군부의 전두환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에서 2525명 가운데 1명을 뺀 2524명의 지지를 얻어 제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광주 ‘5.18자유공원’에는 들불야학 7열사 기념비가 있다. 부채꼴 탑비에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열사의 얼굴을 새긴 부조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붙여 놓았다. 들불야학 창립에 앞장섰던 박기순은 5.18 이전에 불의의 사고로, 윤상원.박용준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서, 박관현은 교도소 단식투쟁 끝에, 신영일은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과로로, 김영철은 고문 후유증으로, ‘오월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박효선은 암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어찌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가르치며 배운 대로 살았던 열사들의 평균 삶은 32년이었다.
5.18 민중항쟁은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끝내 5.18민중항쟁을 폭력과 학살로 짓누르고 권력을 장악했던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는 올가미가 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민중운동의 끊이지 않고 마르지 않는 저수지 샘물 노릇을 하였다.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양심과 정의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 변혁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광주는 말 그대로 빛 고을,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었고 앞길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군부의 계엄확대와 정치 개입을 묵인하고, 국군 20사단의 광주 파병을 승인한 미국을 다시 돌아보면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총을 들고 싸우면서 무장투쟁을 경험한 5.18민중항쟁은 민중운동의 동력과 방법, 이념을 다시 점검하면서 1980년대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