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세계 298호] 파업과 '시민의식'

"네, 민주노총입니다."
"야 이 빨갱이 새끼야!"
"예, 제가 그 새낀데요, 무슨 일이시죠."
대화가 이쯤 오가면 적잖은 사람들이 '주춤'한다. 하지만 망설임은 순간이다. 곧바로 "내일 진료를 못 받으면 알아서 해라" "왜 시민의 발을 볼모로 파업하려 하느냐"는 식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파업의 목적과 교섭에서 보인 정부·사용자의 불성실한 태도 등을 찬찬히 설명하면 열에 한 명 정도는 수긍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듣기 싫다"며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끝으로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이런 전화는 주로 병원과 지하철, 현대자동차 등 파급력이 크거나 규모가 큰 사업장의 쟁의기간에 몰린다. 시간대는 대체로 오후 7시와 9시, 11시 뉴스가 끝나는 시점이지만, 뉴스전문 케이블방송이 생긴 뒤에는 빈도 차이만 있을 뿐 그야말로 '24시간' 끊이질 않는 경우가 많다.
홈페이지도 사정은 마찬가지. '총력투쟁 시기'만 되면 자유게시판은 테러수준의 거친 언어로 빼곡하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를 '양아치' '깡패'로 모는 건 다반사다. 지난 14일에는 "무력 시위하는 파업에는 총기발포 가 당연하다"는 서슬 퍼런 문구까지 등장했다.
정부와 언론이 파업을 해석하는 태도를 뜯어보면, 시민들의 이런 반응은 필연적이다.
이해찬 총리는 최근 노조의 투쟁을 두고 "이익분쟁" "과하다" 등의 표현을 동원했다. 김대환 노동부장관도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어 "파병반대라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할 의도로 대규모 파업을 기도하는 것은 결코 책임 있는 노동운동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다"며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난했다.
임금인상 등 생존권 투쟁은 '이익분쟁'으로 몰고, 노동자가 앞장서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루면 곧바로 '불법파업'으로 몰아붙이는 셈이다. 이들에게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이나, 전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파병반대 여론이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노동3권 중 하나인 '단체행동권'을 마치 사회혼란을 일으키는 불온한 행동인양 덧칠하는 데에는 언론도 한몫하고 있다. '지금이 파업을 할 때냐(6월9일자 한국경제)'는 제목의 사설에는 "그럼 도대체 언제가 파업을 할 때인가"라는 반문이 곧장 튀어나온다. 이밖에도 파업 때마다 파업에 다다르게 된 이유와 노조의 요구사항 등은 철저히 외면하는 한편 '시민불편'을 강조하는 언론의 보도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론노조 이정호 정책국장은 "병원파업이 한창이었던 지난 11일 신문들은 일제히 찌푸린 얼굴의 환자 사진을 실었다"면서 "그러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찌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문제는 시민불편을 과장하는 언론의 태도"라고 비판했다. 파업까지 이르게 된 원인과 요구가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파업으로 어느 정도 불편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민주기본권의 하나인 '파업권' 자체가 생산을 중단시켜 사용자에 압박을 가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이 이를 보장하고 있는 이유는 당장의 불편보다 민주기본권이 더 우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보면 파업의 책임은 노사정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파업의 책임을 모두 노조에 덮어씌운다. 어려서부터 '파업은 나쁜 것'이란 교육을 받고, 성인이 돼서도 왜곡된 정부와 언론의 태도만을 접하는 국민들로선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올바른 시민의식과 공정한 보도가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승철 keeprun@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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