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8일 한미FTA 5차 협상이 한․미간 이견을 크게 드러내며 마무리 되었다. 향후 전망도 불투명하다. 졸속으로 진행된 협상은 전민중적 저항을 불러일으켜 유례가 없는 노농빈학당의 연대투쟁에 부딪쳐야 했고 반미에 대한 대중적 정세를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대책위원회'가 2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 영화인들의 릴레이 철야농성을 진행하는 동시에 광화문 1인 시위를 벌임에 따라 일치감치 한미FTA 저지 투쟁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음에도 2월 3일 정부는 철저한 사전준비나 국민적 여론수렴 없이 협상개시를 선언했다. 선언 당시 정부는 연내타결을 공언했다. 이는 미국 쪽 일정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미국 ‘무역촉진법’이 유효할 내년 6월 이전에 타결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협상초안도 미국안을 그대로 수용했는데 이후 국내의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자 정부 협상안을 대거 변동하는 촌극을 빚어 졸속준비 된 협상임을 반증하기도 했다. 정부의 무리한 협상추진은 광범위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3월 28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270여 시민사회단체를 망라한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분부’(범국본)가 발족, 한미FTA 저지투쟁이 본격화 되었다. 범국본은 최근 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광범위한 세력과 계층을 결집시킨 한미FTA 반대 전선으로 연말 민중총궐기에 이르기까지 한미FTA 저지운동을 주도했다.
6월 7일엔 문화예술인들이 연대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날 청계광장에서는 대중가수와 영화인들을 비롯한 민예총 소속 장르조직과 진보문화예술인들이 대규모 문화행동을 펼쳤다.
6월 9일 1차 협상이 시작되자 투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범국본은 6월 3일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미FTA 1차 협상 저지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연데 이어 2차 협상이 끝나는 7월 15일까지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릴레이 농성을 벌였다. 또 범국본은 5일부터 9일까지 1인 시위, 촛불문화제, 거리 선전전 등을 벌이는 한편 협상이 진행되는 미국 현지에 원정투쟁단을 파견 한미FTA에 반대하는 미정치권, 노동계와 연대투쟁을 벌여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민주노총도 한미FTA 저지투쟁을 위한 조직적 준비를 본격화 했다. 민주노총은 각 연맹 임원들을 위원으로 구성한 ‘한미FTA 저지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육선전사업에 집중 이후 2차 협상 기간동안 진행 할 총파업투쟁의 기반을 다졌다.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2차 협상 기간 동안의 한미FTA 저지투쟁은 치열했다. 7월 1일에는 영화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벌였다. 8일에는 공공노동자들의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있었고 같은 날 한국노총도 3만 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은 12일을 총력투쟁일로 잡고 총파업과 협상장 진격투쟁을 포함하는 강력한 실천투쟁을 벌였다. 이날 민주노총의 실천투쟁은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의 12일 총파업은 6시간 동안 진행되어 전국에서 17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했으며, 1차 미국원정투쟁의 성과를 이은 미국노동계 대표단은 한국을 방문 한미FTA 저지투쟁에 연대했다.
8월 들어 한미FTA 저지투쟁은 소강상태를 보이긴 했지만 여론은 결코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8월 이후 ‘한미FTA 체결 지원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십억원의 비용을 들여 대대적인 정책홍보에 나섰지만 여론흐름을 뒤집지 못했다. 10월 말경의 조사에 따르면 여론은 “반대 52% 찬성40.5%”라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후엔 반대가 90%에 이른다는 소식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 정부 안에서도 날이 갈수록 부처간 이견이 속출하고 미국 요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또한 유일하게 한미FTA의 시혜를 볼 것으로 예측되는 재계는 여전히 찬성입장을 유지했지만 시혜효과가 일부 극소수에 그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소극적인 지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후 한미FTA 저지투쟁이 더욱 강력해질 수 있는 조건이 광범위하게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9월부터 다시 기지개를 켠 한미FTA 저지투쟁엔 여성들이 앞장섰다. 양대노총 여성위원회를 포함한 전국 13개 여성단체가 1일 ‘한미FTA 저지 전국여성대회’를 열었다. 이날 모인 1천여 명의 여성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여성에게 한미FTA 저지투쟁이 더욱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6일부터 미국에서 진행된 3차 협상에도 범국본 원정투쟁단은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10월의 4차 협상은 제주도에서 진행됐다. 한껏 긴장한 정부는 제주4.3항쟁 이래 최대의 공권력을 현지에 투입하였지만 농민과 노동자를 주축으로 한 5,000여 범국본 제주원정 투쟁단은 맨몸으로 결사투쟁을 벌였다. 제주투쟁은 1만여 제주농민의 가세로 위용을 떨쳤다. 협상 첫째날인 24일부터 제주는 협상장인 신라호텔 진격투쟁을 벌이는 대오와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25일엔 해상과 육지를 아우르는 투쟁을 벌이고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결의를 보여 전국적 관심을 모았다. 협상 마지막 날인 25일엔 우왕좌왕하던 공권력이 시위대를 향해 보다 강력한 폭력진압을 감행했고 여론의 우려마저 자아냈다.
10월 제주투쟁의 성공으로 마침내 다가온 11월 22일 1차 총궐기투쟁의 사기는 높았다. 총궐기 집중의 날 이후에도 투쟁흐름은 촛불집회로 주변을 밝히고 있었으며, 마침내 2차 총궐기 날인 29일엔 전국의 주요지역 도청 앞마당이 투쟁대오에 접수되었다. 전국으로 분산된 경찰은 속수무책이었고 어느 때보다 드높았던 투쟁열기는 격렬함과 화염으로 웅변되었다. 이를 지켜 본 보수언론은 또 다시 ‘폭도’ 운운하는 선동을 일삼았지만 언론과 방송을 통해 유포된 광우병 공포가 가세하면서 이미 한미FTA 저지투쟁은 돌이킬 수 없는 정당성을 얻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이후 모든 범국본 집회를 불허하기에 이르렀지만 12월 6일 3차 총궐기는 산발적인 가투투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차 총궐기까지 민주노총은 부족하나마 지속적인 파업동력을 유지했고 2차 총궐기날인 22일엔 11만명이 총파업에 돌입 농민과 함께 민중총궐기의 주력부대임을 보였다.
12월 말 민주노총 총파업의 후광이 거의 잦아들었지만 2006년의 성과가 있기에 2007년 한미FTA 저지투쟁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 한편 범국본은 12월 21일 ‘한미FTA 협상 중간 보고서’를 발표, 반환점을 돈 협상내용 전반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미FTA 협상에서 미국이 초강세를 보이는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에서 한국측은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광우병으로 부활한 쇠고기 문제 그 외 자동차, 섬유의류 카드를 가지고 겨우 게임을 이어가고 있는 수준이다. △쇠고기, 무역구제, 의약품 부문의 요란한 마찰음에도 이미 저울은 기울었다. 판을 새로 짜지 않는 한 돌이킬 수 없다. △미국의 양보 여지가 매우 좁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민주당의 의회장악으로 양보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한미FTA 협상은 손해보는 협상이며 지속할수록 그 손실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박성식 기자 bullet1917@hana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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