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현장에서 언제나 불같은 열정의 노래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박성환(박성환밴드 보컬) 민중가수를 만났다. 박성환씨는 1971년도 강원도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대성악과에 입학한 박성환씨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90년도 21살때 야학선생님을 하며 잊을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선생님의 꿈은 접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야학학생들은 옷을 만드는 제봉사, 제봉보조사등 이었고 나이도 박성환씨보다 많았다고 한다. 야학생활중 음대성악과를 다니던 박성환씨에게 학생들은 가끔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노래를 청하는 학생들앞에서 민중가요 '시다의 꿈'을 부르던 박성환씨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눈물흘리는 학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다의 꿈'이라는 노래가 그들 자신의 삶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앞에서 그도 같이 펑펑울었다고 한다. 이렇게 같이 울고 같이 웃던 학생들이 집회도 참석하고 공부도 하면서 조금씩 변해가시 시작했다. 학생들은 왜 운동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면서 자신의 삶에 자신감을 찾아갔다.

27살 군대를 다녀온 박성환씨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28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에는게는 독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후배집에 언처 살려면서 민중가수로써 생활을 시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를 불러주는 곳이 많지 않아 한달에 3만원, 6만원의 수입으로 살아야만 했다. 경제적 궁핍도 어려웠지만 가장 큰 고민은 민중가요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수 있을지, 음악에 대학 고민은 때로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그를 보아온 주위 선후배들은 2000만원을 모아 음반을 내도록 도아주었다고 한다. 음반선구매 형식으로 모은 돈으로 2000년 첫 음반을 내고, 2002년 미선이효순이 투쟁, FTA반대 투쟁을 통해 박성환씨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훌륭한 조명과 좋은 음향으로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보다, 자신의 음악으로 동지들의 투쟁에 동참하고 무대위에서 눈빛과 눈빛으로 음악을 공감할때 가장 행복하다는 박성환씨, 투쟁현장을 누비는 그에게 공연비 대신 따뜻한 밥한그릇과 막걸리 한사라발로 대신하는 작은 투쟁단사,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이 많다고 한다. 공연비를 줄수 없어 미안해 하는 장기투쟁사업장 조합원들의 따뜻한 말한마디와 환한 웃음이 그에게는 소중한 보람이라고 한다.

노래하는 동안 공감하는 반응이 없을때 가장 힘들다는 박성환씨 그러나 작년 부산ILO투쟁때 화물연대 동지들과 함께한 투쟁무대는 너무나 감격적이었다고 한다. 노래두곡을 불렀는데, 만오천대오에서 터져나오는 함성소리는 진정한 투쟁의 함성, 분노한 전율이 느껴지는 살아움직이는 투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민중가요 한곡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창작의 어려움을 감수하는 박성환씨에게 잊혀져가는 민중가요가 가장 안타깝다고 한다.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아름다운 곡들이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는 지나간 민중가요를 새롭게 편곡해서 재탄생시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우선 필요한 것이 노래을 직접만들수 있는 녹음실을 만들어내는것, 그 녹음실에서 누구나 노래부를수 있는 다양한 반주곡도 만들고 싶어하는 박성환씨, 그 작은 꿈을 위해 올1월 NO FTA 음반을 출시했다. 수익금의 반은 장기투쟁사업장을 위해 나머지는 음반제작비용에 쓰인다.
녹음실을 만들고 싶은 그의 작은 꿈이 올해 꼭 이루어져, 환히 웃는 박성환씨를 기대해 본다.(음반문의 박성환:019-9429-5002)

두현진기자 du03@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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