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위원장이 되기까지 활동=대학 2학년 때 80년 상황을 보면서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을 고민했다. 학교현장에 가면 뭘 할까도 고민했다. 제3세계 교육론도 보았다. 1983년 화곡여자중학교 도덕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전두환정권 때였다. 교사가 정권을 홍보하고 안보의 첨병역할을 하던 시절이다. 교과내용을 비롯해 제반 학교현장을 경험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신임 교사 13명이 함께 발령받아 일본어 강독도 하고 당시 귀하던 사회과학서적도 탐독했다.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85년 학교 근처 자장면집에서 지역교사들을 만나 학교행정의 비민주적 문제와 억압적 관료행정 문제, 교과내용 문제 등을 개혁하기 위한 지역교사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86년에는 교육민주화선언이 있었다. 왜곡된 교육현실과 질곡의 사슬을 끊고 일어나자는 교사들의 그 감동적 선언에 참가했다. 87년 전교조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를 거쳐 1년반만인 89년 드디어 전교조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단체교섭을 통해야 가능하겠다는 인식하에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것이었다. 신임교사 시절 저는 이같은 교육운동 1세대 선배들의 활동에 조심스럽게 참여했다. 그때 읽은 ‘어느 동맹이의 외침’, 이오덕선생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태일평전’을 비롯해 진보적 교육운동가들의 수기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저에게 대학시절은 사춘기와도 같았다. 어두운 혼돈의 시대를 경험하며 갈등했다. 그동안 배워온 것과 새로운 정보에 대한 고민 속에서 운동선배들의 주장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대학시절이 갈등하는 사춘기였다면 학교현장에서는 70여명 아이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생활을 들으며 세상의 불평등과 부조리와 모순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제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전교조 결성에 참여하면서 89년 7월 해직됐다. 이어 노동운동을 하던 남편까지 90년 국보법으로 구속돼 1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4년5개월 해직기간 동안 전교조 상근활동을 했다. 본부 교선국에서 시작해 서울지부 교육연구부장, 본부 여성국장과 부대변인 등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아이도 있는 가정생활을 꾸려나가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히고 삶의 길에 확신을 얻었다. 해직 전까지는 ‘이 꽉 막힌 학교에 평생 있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운동의 영역은 넓고 광대했다. 교선국 활동을 통해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학교에만 있었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사실 기꺼운 마음으로 교육운동에 임했기 때문에 해직될 때조차도 즐거웠다. 아이도 늘 엄마가 일하는 곳을 따라다녔고 집회에도 참여했다. 본부나 지역본부 행사 때마다 아이와 함께 포스터를 붙였고 유인물도 나눠줬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22살이 됐고 지금 군대에 가 있다. 남편이 구속된 상황이었고 해직기간이었다. 시어머니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가장으로서 많은 경험을 했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1,500명 교사들이 함께 해직됐고, 남편역시 조직사건으로 다른 동지들과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당성이 있었고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어 힘을 잃지 않았다. 당시 동료 교사들은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유·신문배달도 했다. 저는 번역을 했다. 힘들고 괴로운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이 자양분이 돼서 평생을 교육운동에 헌신하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 그 점에서 대해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그러다가 94년 복직됐고 소위 8학군으로 불리는 서초중학교로 발령받았다. 팔자에 없는(?) 학교에 갔더니 심수봉 아들, 박찬종 조카 등 유명(?)인사들의 아이들이 많았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들의 비자금 문제를 놓고 토론했는데 다른 반 반장녀석이 “저희 이모부도 구속됐어요”했다. 그래서 “너희 이모부가 누구냐?”고 했더니 장세동이었다. 2년 만에 양천중학교로 전근을 왔다. 우리동네(?)로 다시 온 셈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97년 강서지회사무장, 98년 강서지회장(서울지역 최초 여성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전교조는 99년 7월 합법화과정을 거쳤다. 2년간 휴직하고 교육학대학원에 다녔다. 2002년 분회장, 학교운영위원, 2004년 상조회장도 역임했다. 2004년 여름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당시 전교조는 노무현정권에 공약화시켰던 사안들을 주도하지 못하고 네이스투쟁에 매몰돼 있었다. 전교조 집행부가 조합원들과 유리돼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서울지부장 선거에 나갔다. 2005년부터 2년간 최초의 서울지부 여성지부장으로서 1만4천명에 이르는 조합원들을 대표했다. 그러면서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겸손해야 한다. 또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을 향해 운동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인사 안한다고 야단칠 것이 아니라 교사가 먼저 인사할 줄 알아야 한다. 저는 길을 가다가 야쿠르트아줌마에게도 인사한다. 그분도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가. 제가 전교조 위원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했다. 교육이라는 노동은 그 자체가 다른 연맹의 사안과는 다르다. 9만 조합원의 권익에 그치지 않고 1천만 학생들과 2천만 학부모와 함께 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을 바람직하게 보느냐,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 문제다. 무거운 책무를 느낀다. 그래서 더 신중하면서도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제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 “다시 학교에서, 아이들 속으로, 학부모 밑으로!”다. 교사들의 노동이 이뤄지는 장소는 학교다. 학교는 세상의 변화가 싹이 트고 자랄 수 있는 터전이다. 교실에서의 수업이나 학생과 선생의 만남은 길거리집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신영복 선생은 “가르치는 것은 함께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고 희망에 대하여 아이들과 나누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어떤 이들은 투쟁이라고 하면 집회에 참석하고 농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훨씬 진지하고 치열한 투쟁이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교장과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제가 선거공약에서도 말했듯 교육운동은 교육의 내용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장이 강화될 때 국민들이 교육희망을 느끼고 아이들과 학부모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학교현장의 변화를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을 원활히 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올해 전교조 상 정립방안은=전교조는 안으로 학교개혁운동과 참교육실천운동을 추진하고, 현장 밖으로는 논의기구를 만들어 21세기 교육비전과 교육희망 만들기 사업을 통해 범사회적 논의를 해나간다. 폭넓은 연대가 이뤄질 것이다. 교육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교육철학과 비전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 형성돼야 하고 그것을 통해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올 상반기에는 폭넓은 토론과 논의를 통해 범사회적 담론을 마련하고 그것을 통해 교육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형성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쏟을 것이다. 이를테면 수구보수진영에서 평준화교육을 해체하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나쁘고 불합리한 것인가에 대해 열린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평준화교육이 획일화교육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는 등 사회적 선동이 이뤄지고 있다.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다. 그렇다면 공교육으로는 경쟁력 있는 인간을 키울 수 없는 것인가?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연구를 통해 우리 교육철학과 비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논의가 최대한 풍부히 이뤄져야 교육비전을 국민에게 제안할 수 있다. 대선·총선 때도 공약화하고 쟁취투쟁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논의 자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투쟁을 담보할 논리가 빈약하다.

사학법 재개정문제 관련 정진화 지도부 과제는=개정사학법은 15년의 성과다. 95년 12월9일에 완성됐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물론 애초의 안보다 부족하긴 하다. 이는 열린우리당이 국회 직권상정을 통해 얻어낸 성과다. 사학재단은 보수언론과 종교계를 끌어들여 개정사학법으로는 건학이념을 구현할 수 없다고 선동하고 있다. 전교조가 학교를 말아먹는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사라지고 선동만 난무하다. 사실 종교교육은 사학법과는 관련 없다.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려고 교계를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교육 투명성을 확보하고 족벌체제를 방지하기 위한 감시 차원이며 비리에 대해 쐐기를 박자는 것이다. 개방형이사제가 부분적으로 실시되는 학교의 경우 전교조는 없고 사학출신 일가족이 이사장, 교장, 행정실장 등 요직을 두루 맡고 있다. 열우당은 4대 개혁입법 가운데 제대로 만든 이 법을 끝까지 지켜내야 할 것이다. 최근 진보적 목사들이 종교와 사학재단의 밀착을 폭로, 설득하고 나섰다. 개정 후 1년3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개정사학법에서 보장하는 내용들이 학교 안에서 민주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개악 움직임에 밀려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간 사학비리가 현저히 줄었다. 학교현장이 맑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사학법 개정을 적극 추진했던 열우당이 지켜내야 마땅하다. 우리 역시 사립학교개혁국민운동본부 8백여개 단체 일원으로 사학 투명성 보장을 위해 싸울 것이다. 선전전을 통한 대국민홍보도 필요하다. 한나라당과 사학재단은 한통속이다. 그들은 이를 대선까지 활용하려고 한다. 이를 깨뜨려 사학법을 둘러싼 진실을 공개하고 사회적 공론화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개정당시 70~90%의 국민들이 지지했다. 지금도 유지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전교조는 학교의 낡은 관행을 없애고, 학생인권을 억압하는 학교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1세기 희망만들기는 전교조 본부와 전국지부에서 범사회적으로 해나갈 일이다.

5월 교육대장정 의미와 지향은=전교조는 5월초부터 5.26 전국교사대회까지 교육대장정을 펼친다. 우리는 공약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앙단위 회의, 토론, 공청회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학교현장 방문이 중요하다. 지역 활동가들을 만나고 시민사회교육단체들도 만날 것이다. 조합원들과 함께 실천하고, 지역교육청을 방문해 현안 과제도 풀 것이다. 교육대장정은 현장조합원들과 지역 시민사회노동단체와의 소통을 통해 현안과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다. 올해 사업 기조와 방향, 특히 현장변화를 위해 기획했다. 총연맹이 준비하는 현장대장정과 같이 하면 좋겠다. 경우에 따라 이슈도 같이 내걸고 현안들을 해결하자. 교육대장정 준비가 조금 늦어지고 있다. 3월말 총연맹에서 먼저 시작하고 전교조도 하겠다. 전교조 지부 연수에도 총연맹 위원장께서 결합하면 좋겠다. 민주노총에 대한 전교조 조합원들의 이해와 관심, 친근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석행 위원장께서 요즘 현장을 많이 찾아다니신 것으로 안다. 전남, 경기, 인천에도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민주노총 사업을 현장에서 함께 공유하고 조합원들을 만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전교조는 파업도 잘 못하는데 총연맹에서 부담스런 관계로 보지 않고 전교조 현장 목소리에 귀기울여주시는 것이 신선하다. 민주노총 현장대장정 과정에서 학교현장도 방문해주시면 좋겠다. 전교조는 1만개 넘는 사업장에 조합원들이 분포해 있다. 조합원이 2명 있는 학교도 있다. 그런 단위까지도 방문할 수 있어야 상하부가 유리되지 않고 같이 갈 수 있다. 그래야 관료화도 막고, 현실적 중앙사업이 나올 수 있다. 또 운동이 현실에 뿌리 내리고 지속적으로 설계, 실천될 수 있다. 요즘 3월 신학기를 맞아 학부모에게 편지쓰기운동을 전 조합원 공동실천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어 학급-학부모 만남의 날을 기획 중이다. 전교조 신문은 물론 조직라인을 동원해 전 조합원 실천을 추동할 것이다. 과거 조합원들이 개별적으로 해온 것을 집단적 실천으로 가져가자는 것이다. 초기에는 일부 조합원이 시작하면 따라하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현장실천이 점점 약화돼 왔다. 전교조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현장 분위기도 많이 소원해지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전교조 조합원들의 운동성과 학교현장의 건강성을 위해 집단적으로 묶어세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될 것이다.

‘저출산고령화대책위’에 대해=대책위에는 총 37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교조도 지난주 본회의부터 참여를 시작했다. 현재 3기 의제에서는 청소년 건강과 안전, 복지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이들 살리기 운동에 있어서 건강권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책위 참여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논의를 통해 참여키로 했다. 1·2기의 경우 진척이 없다는 평가가 있지만 현재 의제에 대해 우리는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인스턴트 가공식품문제와 어린이 비만, 급식문제 등이 심각하다. 몸 건강은 마음의 건강과 연결된다. 대책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여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최대한 주장하고 얻어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한 의제라고 본다. 시각차이가 있지만 합의가능한 선까지 대안을 도출하고 가능하다면 좋은 정책을 만들어 시행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아이들의 행복한 건강권 실현운동을 정부가 안하고 우리가 해야 하나 싶다. 우리는 할 일을 안하려는 세력들에게 하도록 만들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한 질높은 공교육 실현’과 ‘사회양극화 해소를 통한 교육복지 실현’이 올해 전교조 사업방향이다.

전교조를 포함한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대중에게=저는 운동이 종합예술이라고 본다. 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추는 춤이다. 위원장은 춤을 출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성원들이 어떤 주제로 춤을 추면 신명나게 춤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을 모아서 스스로 일하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 모두의 열매로 만들 것인가가 저의 고민이고 할 일이다. ‘다시 학교에서, 아이들 속으로, 학부모 곁으로’를 저의 선거 슬로건으로 하는 과정에서도 절감했다. 많은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어떻게 최대한 수렴하고 소통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물 흐르듯 될 수 있다면 종합예술이자 집단창작이기도 한 우리 운동은 성공할 것이다. 조합원들의 생각을 모을 때 뒤에 아이들과 학부모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교육희망을 찾아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 길을 찾아내야 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열린 마음으로 현재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고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 조합원들의 권익문제에 그치지 말고 사회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몫을 잃지 말자. 올해 전교조는 학교 안에서 교육실천도 활발히 하는 한편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나서는 활동들도 할 것이다. 소외계층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들과 협약을 맺어 후원하고 다양한 봉사활동도 할 것이다. 지난해 나눠준 성과급을 각 학교와 지역단위에서 공부방에 지원하고 장학기금으로도 내놓고 있다. 모범들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실천되고 있다. 국제연대와 장학기금 마련 등 사업도 구상중이다. 본부 상근자들이 성금을 거둬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도 지원했다. 서울지부의 경우 지난해 한가위 수익사업을 통해 공부방에 1,300만원을 지원했고, 실업계 학생 35명과 장투사업장 45가정을 추천받아 20만원씩 지원했다. 수구보수들은 구조적으로는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는 자선사업을 많이 한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곳을 찾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도 당당하게 정부에 구조개혁을 요구할 수 있다.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 약력>
1960년 광주 출생
1983년 서울 화곡여중 도덕교사로 부임
1986년 5·10 교육민주화 선언 참여
1989년 전교조 결성 관련해 당산서중에서 해직
1990년 전교조 본부 교선국 상근
1991년 전교조 서울지부 교육연구부장
1992년 전교조 본부 여성국장
1993년 전교조 부대변인
1994년 서울 서초중학교 복직
1997년 전교조 서울 강서지회 사무장
1998년 전교조 서울 강서지회장
1999~2001년 강서양천교육시민연대 강사
2000~2001년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대학원 파견
2002년 서울 신화중학교 복직
2003년 전교조 대의원, 중앙위원, 분회장
2004년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신화중학교 상조회장, 학교운영위원
2005~2005년 전교조 서울지부장,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
2007년 현재 전교조 위원장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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