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노동자들이 민주화항쟁 시발지를 찾았다.

마산 3.15부정선거가 일어난 지 47년이 지난 2007년 4월30일, 북쪽 노동자대표단 60명과 남측 노동자들이 3.15묘역을 참배했다. 5.1절 노동자 통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경남 창원을 방문한 북쪽대표단 60명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남쪽 노동자 대표들이 대회 둘쨋날인 4월30일 오후 마산 3.15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열사들의 얼을 기렸다.

이날 3·15 민주묘지 방문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노동자들이 마음을 모아 남한 민주화항쟁의 시발지이자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독재정권과 민중탄압에 저항한 역사를 되새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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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노동자 대표단 60명은 3·15묘역을 찾아 분향 헌화하고 안장된 열사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어 3·15 마산의거를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계기가 된 김주열 열사 묘역을 참배했다.

마산 3·15묘역은 마산 3·15 의거가 일어난 지 43년만인 지난 2003년 국립묘지로 승격돼 마산의거를 기념하고 후세대에게 혁명선배들의 저항정신을 계승하는 성지聖地로써 보존되고 있다.

전체 면적이 4만3500평인 국립3·15묘지는 의거 당시 희생자 26명 위패를 모신 유영봉안소가 애기봉 기슭 가장 위쪽에 자리 잡았고 봉안소 아래 좌우측에는 희생자 묘역이 있다. 묘역 앞 마산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참배단과 상징부조벽, 민주의 탑 등이 서 있다.

의거 당시 관련 기록과 자료, 영상물 등은 기념관 내에 모두 정리됐다. 이곳에는 의거당시 마산시민들 궐기를 전국에 알린 동아일보 기사와 ‘마산 사건을 적색으로 몰려는 정책은 위험천만’이라는 1960년 4월16일자 동아일보 사설도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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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15 부정선거</b>=60년 3월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의 4대 정·부통령 당선을 위해 40% 사전투표, 3인조 9인조 편성, 애당참관인 축출, 공포분위기 조성, 공개투표, 공무원 동원 등 극도에 갈한 부정선거를 실시했다. 더구나 민주당 선거참관 포기로 자유당 선거종사원이 자유당후보 득표율을 99%까지 지나치게 조작하자 자유당 대통령후보 85%, 부통령 후보 75%로 줄여 개표토록 내무부장관에게 지시하기까지 했다. 선거결과 이승만과 이기봉은 상식을 벗어난 압승을 했고, 이에 부정·불법선거를 규탄하는 전국적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b>▲마산 3·15 의거</b>=60년 3월15일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노리자 이에 맞서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가 12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명이 부상한 사건. 이 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b>▲3·15의거 역사적 의의</b>=1960년 3월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불의에 항거했다.

3월15일 1차 의거에 이어, 4월11일 그 동안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켜 피흘리며 싸웠습니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런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자연발생적이고 의로운 투쟁에 대한 경찰당국의 가혹한 탄압은 전 국민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리하여 이는 곧 “부정선거 다시 하라” “구속된 마산 학생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4·19로 이어져, 드디어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민권이 승리하게 됐다.

자유·민주·정의가 기본 정신인 3·15마산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민족 평화 통일운동으로 확산됐다. 그 도도한 물결은 4·19혁명, 부마민주화운동, 6월 항쟁, 5·18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에 끝나지 않고 미래 민중운동의 불씨로 자리 잡았다.

<b>▲왜 3·15의거가 마산에서 일어났나</b>=남녘의 서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마산은 굴절된 근·현대사 물줄기를 바로 잡는데 큰 몫을 다해 왔기에 언제나 선구적 모습으로 부각돼 왔었다. 지난 1899년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과 함께 일제가 기도한 상권 탈취에 항민들이 똘똘 뭉쳐 필사 투쟁을 벌임으로써 그들의 야욕을 깡그리 분쇄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자주 정신은 1919년 3월10일 추산활사장에 열린 독립만세 시위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 때 의분에 찬 민중들의 핏빛 함성이 4대 의거로 손꼽히는 삼진의거를 촉발케 한 진원지가 돼 민족자존 터전으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됐다.

이렇게 민주혼을 일깨운 의거 정신이 청년 학생들의 혈관에 뜨겁게 계승돼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10월 부마항쟁으로 치달아 유신정권마저 타도해 민주실천 고장으로서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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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정의의 맥을 이어온 우리 고장 마산은 늘 깨어있는 정신, 모두를 포용하는 열린 마음, 굽힐 줄 모르는 올곧은 목소리, 꺽이지 않는 정의로운 몸짓으로 진취적 기상을 키워왔기에 영세 불멸의 민주성지로서 오늘도 찬란한 광휘를 발하고 있다"는 것이 이곳 시민들이 가진 자부심이기도 하다.

(△현장=홍미리, 박항구 기자/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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