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정당하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몸뚱이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 복지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낮고 노동유연성, 노동착취율이 높은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하 국제비교는 OECD국가를 기준으로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산재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의 노동자 투쟁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십 몇 위라고 하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은 몇 십위로 처지는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은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는 최소한의 항거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고 사장으로 위장시킨 특수고용노동자를 양산하는 나라에서 노동자 투쟁이 없다면 그건 유령이 사는 나라이다. 그래서 세상을 뜨자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살율이 높다. 죽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해서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 한국의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정당한 저항이다. 공무원의 노조설립조차 허용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시국선언을 했다고 교사를 해고시키는 국가는 또 어디에 있는가. 노동조합 전임자의 임금을 법으로 금지시키는 나라는? 도대체 한국처럼 노동자 투쟁으로 구속자가 많은 나라를 찾을 수 있는가? 노동투쟁에 집회금지 가처분이 내려지고 손해배상, 가압류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국가는? 이런 나라에서 노동자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의 권리찾기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헌법수호투쟁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정당한 노동자 투쟁은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내지 못하고 있는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25년, 노동자투쟁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청년 활동가는 중년이 넘어가도록 끊임없이 투쟁하였고 어느새 거의 한세대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왜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가. 어째서 대안으로 외쳤던 산별노조는 구호로만 그치고 정치세력화는 지지부진한가. 노동자 세상을 꿈꾸었지만 왜 여전히 노동탄압에 허덕이고 있는가. 이대로 얼마나 더 투쟁을 이어가야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정당한 투쟁을 뛰어넘어야 한다. 노동자 투쟁이 '내 몫 찾기', '조직노동자 권리 찾기'에만 머물 때, 그 투쟁은 '그저' 정당한 '그들의' 투쟁이다. 그들의 투쟁은 정당하지만 우리의 투쟁이 되지 못하면 사회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어디까지가 '내 몫'이고 '조직노동자의 권리'인지 깊이 생각하고 노동자 투쟁의 기본 가치를 재구성해야 할 때이다.
 
공무원과 교사, 공공부문의 정당한 노동3권을 쟁취하고 정당한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 내의 비정규직과 함께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적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직사회개혁, 참교육실현, 공공부문 사유화 저지가 '내 몫 찾기'의 치장이 아니라 실제 활동의 중심이 될 때 노동자 투쟁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선 대기업노조는 노동자 투쟁의 결과물로 얻은 근로조건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을 허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업주의 당연한 탄압에도 '그 근로조건이라도' 지키기 위해 민주노조를 버리는 역설 앞에 서 있다.
 
이치는 당연하다. 자기 것을 나누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순 없다. 내 것을 조금 이라도 더 가지려 하면서 세상을 바꾸자면 누가 그 세상에 동의하겠는가.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비하면 나는 중간밖에 못 가졌으니 인정해달라고? 자기 것을 줄여야만 사회적 힘을 얻는다. 사회적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자기도 적절한 수준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특히 앞에 있는 집단은 자기 헌신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3년 동안 임금을 동결 할테니 내 부문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켜라'며 파업을 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얼마이상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 년 동안 동결 할테니 최저임금을 이만큼 올려라'는 정도는 되어야 노동단체가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왜 우리 것을 줄이면서 자본과 정권의 책임을 면해주는 방식을 택하는가? 내 몫도 찾고 다른 사람 몫도 올리는 방식으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는 그런 방식으로 여태껏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었다. 역사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세상의 올바른 변혁은 앞선 사람, 앞선 집단이 헌신하였을 때 가능하였고 앞선 사람, 앞선 집단이 권리를 누리려고 할 때 그 사회는 후퇴하였다.
 
노동자 투쟁이 '조금 더' 가지려는 방향으로만 진행될 때, 물론 자본주의에서 정당한 투쟁이지만, '더 많이' 착취하려는 자본가들 철학에 파묻혀 버릴 수밖에 없다. '나'와 '노동자'의 물질적 욕망의 수준을 사회적으로 조절하고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제시할 때만이 노동자투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정당한 노동자 투쟁에서 '함께 사는' 노동자 투쟁, '함께 나누는' 노동자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평상시에 '함께 살자'고 운동해야 지배자들의 실체가 더욱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지배자들에게만 '함께 살자'고 주장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나 집단에게 내주기 인색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고 있다.
 
최만정/ 전국일반노협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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