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통해 희망을 봅니다.”

2차 희망버스 행사 때 받은 엽서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2차 희망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조합원과 가족들이 일일이 접었다는 노란 종이배와 함께 엽서를 받았다. 드넓은 바다를 누비는 커다란 선박을 만들던 그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이 작은 종이배를 만들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억장이 무너졌을까 생각했는데, 희망을 본다고?
 
이 작은 선물을 받기 전에 나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 책 작가 모임’ 회원들과 함께 해고자 자녀들에게 전달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하고 적당한 책을 골라 맨 앞 장에 책을 선물 받을 아이들의 이름과 응원의 한 마디를 적고, 한편에서는 일일이 포장을 하고 주소를 적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희망버스에 뭘 싣고 갈까 궁리하다가 해고노동자 자녀들에게 어린이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아이들이 직접 책을 받아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급하게 진행이 되었고 쌍용자동차, 유성, 발레오공조,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자녀들의 이름과 나이, 주소가 적힌 두툼한 자료는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전에야 겨우 받아볼 수 있었다.
유진이, 민서, 지윤이, 민준이 같은 아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일곱 살, 아홉 살 아이들에게 부모가 해고당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응원의 한 마디를 해줄 수 있을까. 사인펜을 쥔 손은 쉽게 움직이질 않았다.
 
‘해고는 살인’인 시대, 아이들에게 무슨 동화책을 주나
 
책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마냥 밝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기에는 아이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왜 우리 집만 이래, 왜 나만 이래, 원망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다고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조금 망설여졌다. 상처 난 자리를 후벼 파는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희망버스가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 전에 책을 다 나누고 우편발송을 할 수 있게 포장해두어야 한다고 서로를 보채지 않았더라면 아이들 이름과 나이만 중얼거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느 작가사인회 자리였다며 별 생각 없이 작가의 한 마디를 적었을 거다. ‘행복하세요.’나 ‘꿈과 희망을 간직하세요.’같은 말들을 꾹꾹 눌러쓸 수 있었을 테지만 부산 영도의 뜨거운 거리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난 200일 동안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5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누군가 긴 겨울을 보내고, 다시 비바람과 한여름의 폭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동안 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제발 여기 좀 봐 달라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정리해고를 철회해야 한다는 그 외침을 왜 이제야 듣게 되었을까. 크레인 위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둔 채, ‘꿈’이니 ‘희망’이니 ‘행복’을 이야기하기가 몹시 부끄러웠다.
그런데 부끄럽고 미안한 내 손에 누군가 활짝 웃으며 노란 배를 쥐어주었다. 당신을 통해 희망을 본다며. 여전히 부끄럽고 미안한데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과 함께 힘이 솟았다. 이런 걸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희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얻기 위해서 희망버스를 탄다고 하더니 이런 걸 두고 말하는구나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엽서와 종이배가 담긴 얇은 비닐 봉투를 눈에 잘 띄는 곳에 챙겨두었다. 희망은 막연한 바람이나 주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럿이 함께 걷는 발걸음으로 만들어지는 오솔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거기 가길 참 잘했지,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나 한 사람이야 그저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그런 발걸음이 모이고 모여 185대의 희망버스를 만들었다는 것을 비오는 부산의 밤길을 걸으며 배운 것 같다.
 
‘팥죽할머니와 호랑이’라는 옛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에게 잡혀먹게 된 할머니가 팥죽 한 그릇씩을 나누어 먹은 밤, 맷돌, 멍석, 쇠똥, 지게들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를 물리치는 이야기다. 판본에 따라 할머니를 돕는 등장인물들은 자라가 되기도 하고, 송곳이 되기도 하지만 호랑이 잡는 사냥꾼이나 포졸, 총이나 칼이 나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봤다.
문득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모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팥죽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려는 밤이나 맷돌, 멍석이나 쇠똥, 아니면 지게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해고는 살인이다.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이후 15명의 목숨이 스러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많은 사업장에서는 정리해고와 불안정고용이 활개를 치고 있다.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고 자본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 하나 정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고장 나면 갈아 끼우면 그만인 부품 말이다. 팥죽할머니를 잡아먹겠다고 큰소리치는 호랑이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또 시민들의 편에 서야 할 경찰은 불법과 탈법을 일삼는 대기업을 보호하겠다며 차벽을 치고 최루액을 쏘며 진압을 한다. 영도 지역의 국회의원이라는 자는 희망버스를 막겠다고 온갖 폭력과 욕설을 내뱉는 ‘어버이 연합’을 격려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힌다. 이건 뭐 이야기 속의 팥죽할머니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황이지 싶다. 포졸과 사냥꾼들이 나타나 왜 남의 일에 참견이냐고, 이건 호랑이와 팥죽할머니가 해결할 문제니까 제3자는 빠지라며 밤, 맷돌, 멍석, 쇠똥, 지게들을 쫒아내는 꼴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나는 동화작가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자꾸 말문이 막힌다. 옆에서 누군가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어린이들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나 이 나라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경찰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대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민에게 곤봉과 군홧발을 들이 밀고 물대포로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를 막아내는 것이 경찰이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또 훌륭한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저 85호 크레인의 하루 방값은 100만이라고, 그런 판결을 내린 판사님이 있다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훌륭한 노동자가 되어 달라고 말할 수가 없다.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둘러대고, 고용을 미끼로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숨통을 죄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노조 가입만으로도 죄가 되는 이 나라에서는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 만드는 ‘희망’
 
그래도 세상에는 밤, 맷돌, 멍석, 쇠똥, 지게 같은 이들이 참 많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지만 힘을 모으면 호랑이 같은 권력과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8월 20일 희망시국대회와 27일~28일 4차 희망버스에 다시 참가하려고 한다. 4차 희망버스에는 무거운 책을 대신해서 가볍고 시원한 희망부채를 준비해가려고 한다. 이번에는 부채 에 마음을 담은 응원의 한 마디를 적을 작정이다. 부채의 바람만으로 한여름 밤의 무더위를 식히지는 못할 것이다. 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청문회를 피하기 위해 해외도피까지 했던 조남호가 꿈을 꾸고 난 뒤의 스크루지 영감처럼 탐욕으로 가득한 마음을 뒤집을 리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붓을 잡은 손에 힘 꽉 주고 ‘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말들을 적어가려고 한다.
 
처음부터 희망이나 꿈은 그들이 주는 선물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희망의 종이배를 건넨 조합원 가족들과, 다시 희망의 부채를 만드는 우리가 한 편이라는 사실이 소중한 희망이다.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살던 팥죽할머니와 밤과 맷돌과 멍석과 쇠똥과 지게가 한편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그 다음엔 솥뚜껑이랑 숟가락이랑 빗자루랑 뭐 그런 것들도 다 한편이라고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희망시국대회와 4차 희망버스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희망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김진숙님과 해고노동자들을 꼭 살려내고 싶다.
 
공진하/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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