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를 위한 자본주의 착취시스템의 상상적 재현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커피 4분, 버스요금 2시간, 스포츠카 59년…. 재화와 상품의 가격이 전부 시간으로 매겨지는 충격적 미래가 펼쳐진다. 영화 ‘인 타임(In time)’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화폐화된 가격으로 매겨지고 거래된다. 화폐와 상품은 교환되고 사람들은 상품의 효용, 사용가치를 얻어 삶을 영위한다.

문제는 인간의 수명이다. 영화에서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노화를 멈추고, 잔여시간 1년을 제공받는다. 이 시간으로 사람들은 음식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집세를 내는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시간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가진 시간을 다 써버려 팔목에 새겨진 생체시계가 ‘0’ 이 되는 순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때문에 부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시간을 갖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하루를 겨우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그도 아니면 훔쳐야만 한다.
 
은행은 화폐 대신 시간을 저장한 하드디스크를 보유한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이 디스크로부터 다운로드 받거나, 다른 사람의 생체시계로부터 직접 스캔 받아야 한다. 스캔 받을 땐 당사자의 동의나 무방비 상태의 조건이 충족돼야 가능하다. 절도와 살인, 도박, 심지어 자살까지도 시간과 연동돼 이루어진다. 기부도 돈이 아닌 시간이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모든 것이 그럴 듯해 보인다. 모든 상품의 가치가 시간으로 환산된 것도 그렇고, 빈부격차에 따라 수명은 물론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도 그렇다. 이 영화의 모순은 시간이 모든 이에게 공통된 속성이 아닌, 물질적인 재화로 환산한 데 기인한다. 시간은 하나의 객관적인 존재형식일 따름이다.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무한히 연속되는 것, 즉 사물의 현상이나 운동, 발전의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개연성을 갖는 것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에너지의 사용과 흐름이 시간이라는 기준으로 나열될 수 있고, 에너지의 양적, 질적 사용이 소득과 부에 따라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시간이 돈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현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상품을 넘어 생명으로 직접 귀결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복과 정의에 대한 관점이다. 실비아(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갑부인 아버지의 시간을 물려받아 수백년을 살 수 있지만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항상 경호원이 따라다니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를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변한다.
 
진부한 것 같지만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돈이 많아서, 오래 살 수 있어서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도 좋을 것 같다. 인간은 유한해서 행복을 찾으려한다는 사실 그것이다. 또 그 행복은 생체적인 범주로만 환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가치가 필요하고,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가 행복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영화는 시간이 항상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일깨워준다.
사이버머니의 거래가 일상화된 21세기 IT세계에 조응한 게임 같은 영화. 25살까지만 자연 생체시계가 작동하기 때문에 모두가 청춘의 모습을 간직한 채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SF적 스펙터클 요소가 빠져있는 점은 다소 아쉽다.
 
강상철 ksc000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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