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난 어린 시절을 깡촌에서 보냈다. 시골생활이 여러모로 좋지만 장마가 시작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비가 오래될수록 주변은 축축한 습기뿐이었고, 아침 저녁은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비에 젖은 나무는 잘 타지 않아 부엌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고, 말릴 곳 없는 젖은 옷은 집안에 그냥 걸려있기 일쑤였다. 따뜻하고 정갈한 집을 가진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지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따뜻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것처럼.

아카시아 잎이 상복 색을 닮아 누렇게 변하는 5월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범국민대회를 마치고 다시 투쟁을 준비한다. 아직 해결된 것도 마무리된 것도 없는 현실 앞에 다시 시작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달려왔는가. 몸을 추스르고 맘을 다독여본다. 파괴되지 않은 일상이 아직 남았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소생하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관계의 복원과 회복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안다. 적을 향한 분노가 내부와 동지를 향할 때, 난 이곳이 절망의 깊은 트라우마 늪임을 자각한다.

지난해 4월, 쌍용차 노동자 실태조사를 했다. 14번째 희생자 사망 직후였다. 결과는 참혹했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22번째 노동자의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최근 1년 간 싸용차 노동자 자살률은 일반 인구의 자살률보다 3.7배 높았고, 심근경색 사망률은 일반 인구보다 18.3배 높았다. 정리해고 이후 노동자들의 사회 관계는 악화되었다고 답했으며, 구조조정 후 1년 반 만에 노동자의 7.3%가 이혼했거나 별거 중이었다. 자녀문제 역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응답자의 78.5%가 자녀의 성격이 나빠졌다고 응답하여 구조조정의 피해가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경제적 고통 또한 경계를 넘었다.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직업이 없는 상태이며, 평균수입은 82.28만 원으로 해고 전보다 약 74% 줄었다. 보건복지부 고시 2011년 최저생계비나 노동부 고시 2011년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소위 트라우마는 심리적 정신적 문제만이 아니란 것이다.

경제적 압박이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져 실질적인 고통과 새로운 트라우마를 낳는다. 지난 상처에 대해 과거형으로 말하는 경우를 더러 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맞물린 트라우마는 고통을 배가시킨다. 뛸 수 없는 사람에게 뛰어보라는 얘기는 하나마나하다. 열패감과 무력감만 심어 줄 뿐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굳이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그리고 국가배상을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을 사실상 외면하고 방치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사실상 외면하고 방치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국가가 기능을 포기한 것이다. 복지국가를 부르짖는 지금,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지자체가 내미는 손에 들려 있어야 할 것이 어찌 말 뿐이겠는가.

그나마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의 심리 치유를 위한 와락센터가 있어 막힌 숨을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오직 민간의 착한 양심에 맡겨서 될 일인가를 깊게 들여봐야 한다. 사회적 부조로 유족이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이것을 빌미 삼아 국가나 지자체가 할 일을 다한 양 뒷짐지고 있는 것은 파렴치의 극치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상태는 훨씬 심각하고 위험한 상태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지자체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해고 이후 숱하게 듣게 되는 트라우마라는 단어, 어쩌면 알지 말았어야 할 단어였다. 주저않는 가족들을 보며, 죽음과 반죽음의 경계가 흘러내려 허물어지는 동지들을 보며 도대체 우린 무엇 때문에 이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왜 유독 쌍용차 노동자들에겐 장마가 계속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공장 파업 당시 구사대와 용역깡패 그리고 공권력이 쏴대던 무수히 많은 폭력적인 무기들의 유효살상기간이 이리도 긴 이유는 무엇인가.

상하이 먹튀자본이 만들어 놓은 예견된 대량의 정리해고가 죽음의 화살이 되어 쌍용차 동지들을 과녁삼아 쉴 새없이 날아들고 있다. 아직 막을 방법과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제는 이어지는 죽음에 대한 추모를 넘어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쌍용차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 싸움을 이기는 것이다. 장마를 끝낼 수 없다면, 장마를 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2009년 쌍용차 파업 당시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변인. 2011년 희망버스 대변인. 현재는 쌍용차지부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획실장. 와락센터 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한겨레 ‘세상읽기’ 고정필진, 한겨레 21 ‘이창근의 해고일기’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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