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20,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 지구가 언제까지 지속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20년 전, 1992년에는 유엔차원에서 이러한 고민을 했다. 그래서 각국의 정부들은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 모여 유엔 주제 하에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논의를 했고, 이윤만을 생각하는 난개발로는 더 이상 지구가 온전히 지속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약속’을 했다. 지구의 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막아야 한다, 평등한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대안세계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등의 결의를 모았었다. 그리고 2012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다시 ‘그’ 각국 정부들이 모여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 진지한 논의의 결과는? 국가 간의 평등 및 각국 내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어떠한 조치는? 대책마련은? 하다못해 어떤 구체적인 목표수치라도?

국제노총은 리우+20회의가 열리기 전인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세계 노동자 총회를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개최했다. 56개국의 66개 조직에서 396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특히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남미 지역의 노동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전개했다. 3일간의 학습과 논쟁과 결의 속에서 새로운 경제모델의 대안을 마려해야 하고, 친환경적인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며, 사회보장 확대를 리우+20회의 결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6쪽에 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은 세계 노동자들의 의견을 표명하는 의미도 있고, 리우+20 회의에 참석할 각국 정부를 만나 국제노총의 결의문을 채택하라고 압박해야 하는 과제물이기도 했다.

국제노총은 또한 전세계 민중 진영과 함께 6월 13일부터 22일까지의 민중회의(People Summit)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민중회의는 브라질 노총은 물론 남미지역의 노총 혹은 노동조합 조직들, 전세계 환경단체들, 원주민들, 여성단체들, 청소년, 반핵단체 등 세계 각국의 민중들이 모여 대안세계를 스스로 모색해야 하고, 모색을 할 수 있는 시기가 그렇게 길게 남아 있지 않음을 공유했다. 특히 남미지역 노동자들이 주최한 ‘지속가능성의 가능성’대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속가능성을 모색할 수 없고 새로운 경제모델이 필요함을, 유엔 및 각국 정부들은 지금껏 지속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못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결국 민중회의에서의 예견(?)처럼 리우+20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말잔치로 마감을 했다. 노동자들, 환경단체, 여성들, 원주민들 등 모든 민중들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리우+20은 1995년 유엔 북경여성대회에서 이미 합의된 바 있는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를 최종문안에서 삭제하면서 실망감을 더욱 부추겼다.

그나마 성과를 찾아본다면 GDP가 더 이상 평가의 지표가 될 수 없기때문에 새로운 지표(기준)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논의키로 했다는 것과 지속가능한 소비와 생산(SCP)을 위한 10개년 계획을 채택한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유럽국가를 중심으로 투기자본과제(FTT) -호빈후드 세금-를 국제법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국정부? 한국정부는 리우+20 협상과정에서 공동의장국 역할을 수행했다. MB정권은 이례적으로 대통령이 장관3명(기재부, 환경부, 외교부)을 대동하고 참석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한 일은? 오로지 ‘한국식 녹색성장’을 선전하는 일이었다. 4대강 사업과 자전거 길, 녹색 일자리 75만개 창출을 성공한 사례로 소개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국제기준과 국제적 합의는 매우 중요하다. 당장 현실에서 실행이 되지 않더라도 제기할 수 있는 기준이 되며 도약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전이 없는 논의, 구체적인 실행방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는 합의문, 미국 등 강대국의 동참이 없이는 어떠한 결의도 미사여구에 불과한 현실은 무시될 수 없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리우+20을 통해 보다 더 분명히 진 것은 노동자, 민중들이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노동자, 민중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국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이 다소 추상적이게 들릴 수도 있으나 봄과 가을이 없어져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내일 눈을 뜨면 지구가 물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니 내일, 눈조차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내일은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김미정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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