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과 통제의 권력 이데올로기 ‘송곳니’

송곳니는 본능의 뿌리다. 인간에게 송곳니는 퇴화의 장소다. 비인간적인 좀비와 드라큘라만이 대신하는 곳이다. 날것을 멀리하는 인간의 송곳니는 상징적 공간이다. 송곳니는 어른이라는 ‘보수’로의 아이콘이다. 아버지의 훈육이 자리 잡는 지점이기도하다. 송곳니는 세뇌가 발육당한 경계의 결절점이다. 영화 ‘송곳니’가 신랄한 풍자와 상징으로 권력이데올로기를 스케일링한다.

넒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도시 근교 한 저택에 아이들 세 명을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 아이들은 높은 담장으로 바깥세상과 철저히 단절돼 있다. 유일하게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인 욕구를 위해 가끔 회사 경비인 크리스티나를 들인다.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돼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아버지.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가던 큰딸은 충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아이들은 갇혀있지만 외부로의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대문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훈육에 의해 길들여진 결과다. TV나 인터넷, 심지어 전화조차 할 수 없다. 반항할 기세도 없다. 오직 아버지에 대한 순종만 있을 뿐이다.

폐쇄된 공간에 피실험자들을 넣어두고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적 장치와 배경, 대사의 처리가 인상적이다. 아이들은 유아들이 아닌 성숙한 육체의 20대 초반이다. 유독 핥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유일하게 외부에서 온 여자, 언니, 아버지에게도 핥아주어야 하는 강박이 요구된다. 구강기 아이와 다르지 않다. 남녀 배우의 성기와 심지어 발기된 남성의 모습까지 나오지만 외설스럽지 않다.

부모 결혼기념일에 큰딸이 춤을 추며 몸부림치는 장면이 오히려 우울하다. 송곳니는 거짓이고 억압이며 자아를 억누르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남매간에 비행기 모형을 놓고 벌이는 칼부림, 고양이에 대해 악감정을 분출하는 장면,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목, 아령으로 송곳니를 부수고 아버지의 차 트렁크에 들어간 ‘큰딸’의 마지막 엔딩 장면이 섬짓하다.

아버지는 시스템의 통제자이고 권력자다. 어머니는 가부장적 권위 앞에 선 중간관리자다. 각종 은유와 비유, 상징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 즉 현실이다. 송곳니가 모든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총체적 상징이자 경고로 다가오는 이유다. 우리는 이들이 사는 집 밖에 산다. 그렇다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현대문명의 우울한 청춘들이 좀 더 깨어있을 것을 주문하는 영화 ‘송곳니’. 내 송곳니가 왜 이렇게 시큰거리는 것일까.

강상철 ksc000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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