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노무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 바위에서

無言

민들레가 피는 것도 제 영혼의 말일 건데

유언 한 줄 써 두고서 뛰어내린 이 바위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가슴 속에 새겼을까.
 
부엉이 울음들이 잠시 멈춘 그 틈에서
허공에 써 내려간 한 획의 뚫을 곤(丨)자
無言의 획으로 남아 무슨 글을 완성할까.
 
참매미 나무 등에 혹처럼 매달려서
소리로 완성하는 글들을 남기는데
내 몸의 척추 뼈 같은 그 無言은 무엇일까.
 
산다는 게 죄가 되면 절벽이 되는 건가
아무리 둘러봐도 바람 같은 말뿐인데
이 세상 두고 가는 말, 無言 말고 뭐 없을까.
 
 
임영석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에서
 
노동자 시인 임영석이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동방)를 출간했다. 시인에게 일곱 번째 작품집이다. 그는 만도 문막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노동현장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 흘려 일하며 틈틈이 쓴 예순 두 편의 시조와 시, 산문이 이번 작품집에 실렸다.
임영석 시인은 시조 한 작품마다 그것을 쓰기까지 마음에 켠켠이 간직했던 시상들을 또하나의 산문으로 정리해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시인이 시조작품과 함께 선물처럼 선사하는 산문들을 읽으며 그가 삶을 살아가며 보고 느끼고 고민하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故노무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 바위에서’란 부제가 붙은 위 시 ‘無言’에도 시인은 또하나의 산문을 곁들였다. “(중략) 故노무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 바위에 올라 바라보니, 내 눈에는 뚫을 곤(丨)자만 보였다. 죽음으로 뚫어낸 무언의 말, 바람 같은 말만 들렸다.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러웠을까? 죄스러웠을까? 그 양심의 거리가 절벽처럼 보였다. 당당하지 못하면 절벽이 될 수 없다. 뛰어내린 거리만큼 당당했을 뚫을 곤(丨)자로 무언의 말을 남겼다고 본다. 서로 미워하지 마라, 서로 증오하지 마라, 사람 세상 별것 아니니 허공처럼 서로가 마음 다 풀어 놓고 살라는 말로 들렸다...(중략)”
임영석은 시조 ‘초승달을 보며’로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는 이번에 출간한 시조집에 수록됐다. ‘초승달을 보며’는 심사위원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은 작품이다.
유종인 시인은 이 작품집 해설을 통해 임영석 시인을 “천민자본의 세상에 시난고난 병들어가는 마음을 당당히 들고 나온 차력사借力師”라고 표현했다. 이어 그는 “어눌하고 내쳐짐 당한 마음을 되가지고 나왔음에도 그는 쉽사리 주눅 들지 않으려 한다”는 표현으로 조용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임영석 시인의 새 작품집이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조집 출간에 즈음해 만도가 문막공장에 직장폐쇄를 단행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리라. 노동을 억눌러 착취와 이윤을 더하려는 자본과 그것을 방조하는 권력의 침탈은 어느 노동현장에도 예외가 없다. 거기 만도 문막에 노동자 시인 임영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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