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유럽에서는 경제위기에 대한 반성과 비판 흐름이 형성되며 마르크스에 대한 유럽인들, 특히 청년들의 관심이 높다고 한다. 이에 앞서 2006년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의 세기적인 역작 <자본론>과 이름이 같은 연극 <자본론 1권>이 상영됐고, 2009년엔 잠시 한국에서도 공연됐으며 중국에서는 뮤지컬로도 제작됐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또 맑스의 얼굴을 새긴 신용카드가 인기였다니 이는 다소 아이러니하다. 붐은 꽤 지속적인 것 같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유럽에서 <자본론>과 <공산당선언> 읽기 붐이 거세다며 ‘마르크스의 부활’로 명명했다. 이 소식은 한국 언론을 통해 국내에 전해졌고, 마르크스의 부활을 다루지 않은 언론이 드물 정도다. 조중동조차 신경에 거슬린다는 투로 한국 출판계를 중심으로 마르크스가 부활할 조짐을 보도했으며, 유명한 칼럼이스트 고종석은 인상 깊은 책 가운데 하나로 <공산당선언>을 소개했다.

- 마르크스, “모든 것을 의심하라”
한국일보는 “전 세계 7,500만명에 이르는 청년 실업자들은 출구를 마르크스에서 찾고 있다. 부활할 마르크스조차 존재하지 않는 한국은 대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미미하지만 한국에도 맑시즘은 자신감을 되찾고 있다. 12년째 <맑시즘>이라는 정치토론행사를 개최해온 정치단체 ‘다함께’는 얼마 전 <맑시즘2012>를 개최하며 서울 주요거리에 현수막까지 내거는 등 적극적인 홍보를 시도했다. 이 ‘다함께’가 통합진보당을 집단 탈당했다. 이를 두고 통합진보당에서 마르크스가 떠났다고 표현한다면 상당한 과장이다. 그러나 가히 아노미에 빠진 통합진보당의 현재는 마르크스의 좌우명을 떠오르게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마르크스의 좌우명이다. 진보정당이건 노동운동이건 혁신을 말하지 않는 이가 없는 지금, 마르크스의 좌우명에 빗대어 보자면 혁신 공방을 벌이는 사람들의 말 중에 ‘동지’와 ‘믿음’을 앞세운 주장의 맥락은 꽤나 불편하다. 신앙처럼 동지라는 관계 속에 비판을 가두는 맹목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일수록 동지의 범위가 좁고 그 범위 밖에 머문 이들에 대한 불신은 깊다.
 
- !보다 ?가 많은 대화
물론, 동지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운동을 하겠다면 동지의 범위는 최대한 넓고, 믿음은 동지에 앞서 사람 일반에 대한 믿음부터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만 동지는 연대를 가능케 하고 믿음은 소통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심 말뿐인 동지와 진정한 동지를 구분하면서, “왜 동지를 믿지 않는가!”라며 던지는 비난은 상대의 비판 혹은 우리의 성찰을 억제시키는 버티기에 불과하다. 비판이 억제되면 혁신도 억제되기 마련이다. 혁신이 절실하다면 믿음보다는 의심이 앞서야 한다. 믿음 이전에 반드시 믿음의 근거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답하지 못하는 믿음은 집단의 맹목이다. 의심에 따른 질문은 미움의 부산물인 불신과는 다르다. 혁신은 일종의 끝이며,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져 어떤 것과는 단절해야 하고, 그래야만 다른 시작이 가능하다. 혁신하고자 한다면 이제 의심(?)에 집중하자, 집단적인 믿음(!)보다 집단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보다 질문(?)이 많은 대화를 시작하자. 믿음(!)은 맹렬한 질문(?)을 타고 도착하는 이성의 정거장이 돼야 한다.
 
박성식/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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