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격 막장 내면파괴 언어배틀코미디 ‘대학살의 신’

바야흐로 위기의 시대다. 신뢰의 위기, 가치의 위기, 소통의 위기다. 요즘 ‘진정성’이란 단어가 회자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왕따’ 문화는 아이들 세계에 끝나지 않는다. 적과 아군의 구분도 모호하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쉽다. 말 한마디로 천 냥을 갚기는커녕 빚지는 시대가 됐다. 진리가 지금처럼 역설적인 시대도 없다. 영화 ‘대학살의 신’이 교양과 이성을 초토화한다.

양가부모가 아이싸움 사건을 해결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성과 합의의 정신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대학살의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1살 재커리가 친구 이턴의 앞니를 부러뜨린 아이의 폭력싸움은 어른의 말싸움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싸우면서 클 수도 있죠. 어른들이라도 이성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 한마디가 영화를 내내 비웃듯 관통한다.

피해 아이부모 페넬로피 부부는 헤어지기 전에 커피와 먹을 것을 내놓는다. “가해자의 아이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사과하러 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슬슬 신경을 긁는 말들이 오간다. 이내 양가간 자기방어가 시작되고 온갖 말들을 내뱉는다. ‘진정한 말의 대학살’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내면의 대학살을 방불케 하는 대사들의 향연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대사와 상황극에 빠져버리고 웃음을 연신 폭발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이 세상에 내 편은 없고,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영화가 주는 웃음은 가볍지도, 무디지도 않다. 웃음 이면에는 날카로운 통찰이 깔려있다. 가장 우아한 집에서 가장 우아한 사람들의 ‘대학살의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적인 내면을 담아내는 섬세함이 돋보이는 이유다. 백미는 단연코 대사다. 양가부부 4명의 캐릭터가 수많은 말들을 내뱉고 있지만, 서로 제대로 소통하는 이는 하나 없다.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현대의 관계적 위기를 일상의 이면으로 끌어올린다. 양가 소속간 이해관계는 부부 구성원간의 소통의 문제로 확대 비화된다. 유희에 지나지 않을 내용이 관계의 위기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의 힘이다. 대학살의 비극은 그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얘기다. 진정성이 비로소 삶의 도마에 오른 셈이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를 거쳐 국내까지 휩쓴 걸작연극 ‘대학살의 신(Canage)’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양가 엄마로 나온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 대결도 볼 거리다. 감독은 영화 ‘피아니스트’(2002) ‘올리버 트위스트’(2005)로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가 맡았다.

강상철 ksc0001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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