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민주노총 정책부장
‘데자뷰’라는 말은 ‘이미 보았다’라는 프랑스어다. 최근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연금정치에도 데자뷰 현상이 있는 듯,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중심엔 두 가지 자극적인 선동이 있다. 국민연금이 고갈난다는 것과 국민연금을 탈퇴하자는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난다?
지난 2003년 정부는 연금재정이 고갈난다며 소위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2047년에 기금이 완전히 소진되기 때문에 보험료를 15.9%까지 올리고, 급여 역시 50%까지 낮추자는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현재, 이러한 '기금고갈론'은 국민연금 급여를 40%(2028년)까지 낮추고도 여전히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 잡으며, 연금개악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는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국책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국민연금기금이 2060년 고갈될 예정이라, 보험료율을 13~15%로 약 44~89%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공단 연구원도 재정안정을 위해 수급연령을 더 늦춰야한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3월에 정부가 제3차 연금재정추계 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연금고갈을 들먹이며 또 다시 국민연금을 개악하려는 사전포석의 혐의가 짙다.
정말 기금고갈이 되면, 연금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후세대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줄까. 그렇지 않다. 민간보험이 지급불능상태에 빠지면 그럴 수 있겠지만, 국민연금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지급한다. 애초부터 국민연금제도는 기금고갈을 전제로 설계돼 있고, 기금이 소진되면 대부분의 유럽국가처럼 적립금이 없는 부과방식으로 전환된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막대한 기금을 적립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국가도 일본, 미국, 스웨덴, 캐나다밖에 없다. 또한 후세대가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도 지나친 과장이다. 기초연금 10%를 확대하더라도 전체 연금지출이 GDP대비 차지하는 비율은 약9.8%수준으로,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2000년대 중반 연금지출 보다 낮은 수준이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기금고갈론’은 연금제도외에 기금운용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갈을 막으려면 투자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며, 주식이나 대체투자 등 위험자산에 투자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수익률을 위해서라면 이마트, 쌍용차 등 반사회적 기업뿐 아니라 도박산업도 마다하지 않고 있을뿐 아니라, ‘제2의 맥커리’행세하며 고속도로 통행료를 마구 올리는 등 폭주하고 있다.
 
국민연금 탈퇴하자?
정부 못지않게, 국민연금 개악논쟁에서 비중 있는 조연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국민연금 탈퇴하자는 주장이다. 정부가 연금 불신을 부추길 때마다, '한국납세자연맹'이란 단체가 나타나 국민연금 탈퇴하자며 선동한다. 2004년 ‘국민연금 8대 비밀’이 그랬고, 또 최근에는 아예 국민연금 탈퇴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국민연금을 탈퇴하자거나, 선택권(자유가입)을 달라 등의 주장은 곧 연금을 민영화하자는 정치적 주장이다. 노후문제를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 또는 시장에서 민간보험 상품으로 구매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자는 것과 같은 셈이다.
국민연금을 민영화했을 때 가장 수혜를 받는 것은 누굴까. 먼저 사용자다. 노동자의 경우, 국민연금 보험료의 절반을 사용자가 부담한다. 사용자 입장에선 국민연금이 없어지면 그만큼 비용부담이 적어지니, 단기적으론 가장 큰 수혜를 받는 셈이다. 그 다음으론 민간보험사다. 국민연금이 비어진 크기만큼 불안해진 노후는 곧 민간보험사에게는 시장과 수요의 확대를 의미한다.
국민연금이 없는 노후는 어떨까. 이미 그 암울한 미래를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국민연금에 가입할 기회가 없었거나, 가입기간이 짧은 현재의 노인세대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노인빈곤율과 자살율을 보이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봐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칠레는 1981년 피노체트 군사정권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공적연금을 완전 민영화했고,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들로부터 ‘가장 모범적인 연금제도’로 칭송받아 왔다. 그러나 2008년 칠레는 사각지대 해소와 급여적정성 등을 위해 다시 연금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임금비정규노동자, 여성, 자영업자 등의 무연금·저임금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민간투자신탁회사(AFPs)의 높은 수수료 문제도 개혁의 도마에 올랐다.
 
비록 연금급여가 기존에 비해 많이 축소되어 노후소득이 더욱 불안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지금도 민간보험보다 높은 수익비를 유지하고 있으며, 소득재분배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연대와 노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여전히 핵심적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노후를 위해서는 ‘기금고갈론’의 프레임에 갇히거나, 국민연금 탈퇴하자는 거짓 선동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가 요구해야할 것은 국민연금 폐지가 아니라, 강화다.

이재훈 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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