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비정규직과 함께 치열하게 달렸던 민주연합노조의 사령관

199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간밤에 비가 많이 왔다. 빗줄기는 새벽에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사나웠다. 빗속에 훗날 김헌정의 평생 동지가 될 홍희덕 씨는 일을 나섰다. 서울로 연결된 의정부시 장암동 동부간선도로 삼거리에 노란 비옷을 입은 환경미화원 2명이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홍희덕 씨와 동료 김경영 씨였다. 두 사람은 언제처럼 자판기 커피 한잔에 담배를 피웠다. 정확히 새벽 6시 두 사람은 비속으로 쓰레기와 싸우러 나갔다.

홍희덕 씨는 상계동 쪽으로 김경영 씨는 의정부 신곡고가교 쪽으로 왕복 세 시간 정도 걸린다. 김씨는 51살로 마흔 넘어 딸 성은이를 봤다. 고향 파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나와 가구공장을 다녔다. 그러나 가구공장을 경기를 많이 탔다. 김씨는 공장을 떠돌다 딸이 태어나자 자녀 학자금을 준다는 얘기에 두말없이 청소부가 됐다. 아내는 식당에서 일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다리를 끌며 돌아왔다.
 
6시 30분쯤 여전히 어둔 도로에서 김씨의 몸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도로에서 10m 이상 떨어진 낮은 언덕 위에 51살 청소부의 육신은 찢어지고 부서진 채 떨어졌다. 장화나 휴대폰 같은 유품은 열흘이 지나서야 수거했다. 김씨가 맡은 구역을 이어받은 동료들은 작업 때마다 발견되는 김씨의 유품을 보면서 울었다.
 
홍희덕 씨는 자기 구역을 다 쓸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전 9시 30분. 빗속에서 짝지를 기다렸다. 둘은 언제나 만나서 비질을 시작하고 다시 만난 뒤 헤어졌다. 홍씨는 휴대폰을 꺼내 돌아오지 않는 김씨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반장과 통화 끝에 사고 소식을 들었다. 홍씨는 김씨가 숨진채 누워 있는 신천병원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경찰은 동료의 시신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험하다고만 했다. 울다 기절해버린 동료 김씨의 아내가 옆에 있었다.
 
의정부 시장은 시청 소속으로 있다가 시설관리공단으로 넘어가도 근로조건은 달라질 게 없다고 했지만 공단 관리자들은 청소 일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두 사람이 작업하던 구간은 자동차가 질주하기 때문에 새벽을 피해 원래 오전 9시부터 일했다.
 
안전한 곳은 오전 4시30분부터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단 관리자들은 이런 도로 상황을 무시하고 모두 오전 6시에 근무하라고 일률적으로 맞춰 버렸다.
도시는 자신을 배설한 욕망의 잔해를 치우던 김씨마저 삼켜 버렸다. 비는 멎었고 사람들은 이름 없는 청소 노동자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1999년 7월 25일 일요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민주연합노조는 이렇게 출발했다. 민주연합노조를 만든 김헌정 씨는 3년전 암으로 숨졌다. 그의 동지 홍희덕 씨는 18대 국회의원을 마치고 약속대로 노조로 돌아왔다. 홍희덕 전 의원은 이 책에 “부끄럽고 부족한 그러나 열사를 믿고 의지했던 늙은 청소부가 (이제서야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그리곤 김헌정 씨에 대한 기억이 “어려운 시기에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잡이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경영 씨가 숨지던 날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장 김헌정 씨는 공인노무사 2차 시험을 쳤다. 노무사 일을 밥벌이 수단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동안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은 미화원을 노동자로 여기지 않았다. 노동자하면 제조업 금속 노동자만 생각했다. 책으로 세상을 파악한 ‘먹물’들이 금속노동자만을 짝사랑하는 동안 미화원들 공공, 민간서비스 영역의 노동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외롭게 견뎌야 했다. 홍희덕 사무장은 그 전에 삼양유지 사료창고에 다니며 25kg 짜리 포대를 트럭에 싣고 내렸다. 그렇게 작은 사람이.
 
김헌정 씨는 대학 시절 독재정권 물러가라며 시위했고, 이후엔 노동자들과 함께 하러 공장에 들어갔다. 자신이 나고 자란 의정부, 동두천의 노동현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다갔다. 의정부 등 경기북부의 노동현장은 영세했다.
 
김헌정은 고려대를 나온 후배 김인수와 민주노총 경기북부에서 일하던 아내 양미경과 함께 동두천 환경미화원들의 권리를 찾는 싸움을 도우면서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의 현실에 눈을 떴다.
 
동두천 청소업체들은 미화원 수를 부풀려 인건비를 횡령했다. 퇴직 경찰과 업체 상무도 미화원으로 등록시켜 돈을 빼돌렸다. 정작 미화원들에겐 22년 동안 연차수당도 안 줬다. 41명이 하던 일을 26명에게 시키고 상여금은 250%나 깎았다. 안전행정부의 미화원 임금지침마저 지키기 않았다. 미화원들의 월급명세서와 시의회 속기록을 꼼꼼하게 뒤진 김헌정과 김인수의 문제제기로 업체는 횡령한 돈 1억 5천만원을 토해냈다.
 
동두천미화원노조가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 시청과 업체는 시간을 벌면서 치밀하게 반격해왔다. 미화원들의 근무태도를 시비걸고 재활용품을 팔아 챙기던 부수입도 문제 삼았다. 노조원들은 탄압에 하나둘 이탈했다. 김헌정은 눈물로 노조원들에게 매달렸지만 결국 졌다. 김헌정은 동두천의 실패의 원인을 곱씹었다.
 
1999년 2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국 기초자치단체 환경미화원 대표 18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의정부시에선 김종열 반장이 참석했다. 미화원들은 “정권이 바뀌니 우리도 좀 좋아지려나” 기대했다.
 
몇 달 뒤 김기형 의정부시장도 시청 소속 환경미화원 모두와 함께 밥을 먹었다. 시장은 미화원들 소속이 시청에서 시설관리공단으로 바뀐다고 운을 뗐다. 월급과 일하는 조건을 똑같다고 강조했다. 미화원들은 시장님 말씀에 박수까지 쳤다. 시장과 밥 한 끼 먹고 미화원들은 군말 없이 공단으로 넘어갔다.
 
의정부 미화원들은 1999년 7월부터 공단 소속이 됐다. 상황을 완전히 뒤바꿨다. 공단으로 넘어오면서 만 61세였던 정년은 57세로 줄었다. 공단은 57세 넘는 사람을 모두 퇴직시키고, 일하다 다친 사람까지 권고사직시켰다. 이렇게 11명이 쫓겨났다. 시장님은 밥 한 끼 사주고선 밥줄을 끊었다. 공단은 근무질서를 잡는다며 벌칙제를 도입했다.
 
홍희덕 전 의원은 공단으로 넘어간 첫 달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공단으로 옮기면서 들어온 장석훈 반장은 앞에 나서는 걸 꺼리지 않았다. 장 반장은 참다못해 1999년 7월 22일 민주노총 경기북부지부 사무실을 찾아 양미경 조직부장과 상담했다. 양미경은 김헌정의 아내였다. 둘은 김헌정이 한양대, 양미경이 숭실대에 들어간 1983년 3월 동두천에서 처음 만났다. 양미경도 김헌정처럼 학생운동을 했고 위장취업해 공장에도 다녔다.
 
중산층 가정에서 굴곡 없이 큰 김헌정과 달리 양미경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부대끼며 자랐다. 양 부장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동두천 생연동에서 밥집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가난한 술꾼의 푸념과 양색시의 눈물을 보며 사춘기를 보낸 양 부장은 밑바닥 정서를 잘 이해했다.
 
양미경과 장 반장이 다음 만날 약속을 한 날이 7월 26일인데 하루 전 7월 25일 새벽에 김경영 씨가 변을 당했다. 7월 26일 약속에 맞춰 양 부장은 미화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중랑천 다리 밑으로 나갔다. 양 부장은 거기서 홍희덕 씨와 뒤에 경기도노조 부위원장이 된 나천봉 씨를 만났다. 전날 동료 김씨를 잃은 두 사람은 절박했다. 민주노총에서 나왔다는 처음 보는 30대 여성에게 두 사람은 봇물 터뜨리듯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양 부장은 홍희덕과 나천봉을 한눈에 알아봤다. 평범한 미화원들의 눈에서 재치와 기개, 지혜와 인내를 얽었다. 양 부장과 남편 김헌정은 두 사람을 믿고 노조설립을 추진했다.
 
1995년 2월 미화원이 된 나천봉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반장은 업무배치 권한을 무기로 동료들에게 담뱃값과 술값을 뜯었다. 신용카드 사용이 뜸하던 시절이라 터미널과 유흥가 구역을 맡으면 하루 3만원 줍는 게 예사였다. 고물이 많은 동네도 부수입이 짭짤했다. 반장에게 밉보이면 고약한 구역만 떠맡았다.
공무원들은 반장에게 쥐꼬리만 한 권한을 쥐어주고 미화원들을 이간질했다.
 
장석훈 반장, 홍희덕, 나천봉 씨는 모든 미화원을 가입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민주투사가 대통령이 된 1999년에도 의정부 미화원 노조결성엔 철통같은 보안이 필요했다. 당시 공당 이사장 박용래는 의정부서 수사과장을 지내고 총경으로 퇴직한 터였다.
 
노조 창립은 1999년 8월 9일로 정했다. 나흘 전 받은 월급봉투는 1인당 40~80만원까지 줄었다. 공단은 근속가산금과 정근수당을 멋대로 빼 버렸다.
 
김헌정은 노조 설립 이후를 고민했다. 공단 소속 가로반 미화원만으론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담당하는 업체 소속 미화원들과 함께 해야 했다. 김헌정은 양미경에게 공단 소속을 넘어선 의정부 전체 미화원을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설립 당일 쟁의부장 나천봉은 연대 온 동두천과 구리 미화원들과 사수대를 맡아 경찰과 공단 관계자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의정부 미화원들은 동두천과 구리 분들의 연대에 두고두고 감사했다. 아무리 같은 일을 한다지만 자신들 일도 아닌데 동두천과 구리에서 차비 들이고 시간 쪼개 와 준게 고마웠다. 가로반 전원인 73명이 가입했다.
 
이렇게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초대 위원장 장석훈과 홍희덕 사무장, 나천봉 쟁의부장으로 출발했다. 이날 김헌정은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장 자격으로 미화원들과 첫 대면했다.
 
이렇게 ‘10년 대장정’이 시작됐다. 의정부지역노조에서 출발해 경기도노조를 거쳐 전국조직인 민주연합노조를 세웠다. 이들은 미화원, 수로원, 준설원 등 전국의 지자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며 대한민국 최초의 미화원 출신 국회의원 홍희덕도 만들었다.
 
노조는 결성과 동시에 시청을 상대로 시 소속으로 원상복귀를 요구했다.
이 시간 김헌정은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노조원들이 긍지를 찾아야 한다고 느꼈다. 항의하고 싸우는 일은 무조건 노조원들이 직접 나서게 했다. 대신해주면 노조원들은 들러리가 되고 만다. 퇴직금 명세서 받기도 73명이 모두 구청 민원실을 찾아가 집단으로 신청했다. 낮은 단계의 투쟁이었다. 공단과 시청에 빌미가 될 만한 행동을 금했다. 근무시간 음주나 재활용품 팔아 부수입 챙기기 등을 없앴다. 그러자 동료애가 생겨났다.
 
의정부 싸움에서 김헌정과 양미경은 둘 다 구속돼 부부가 나란히 같은 구치소에서 보낸 끝에 이겼다. 김헌정은 4번의 구속 끝에 몸을 추슬러 움직였던 2003년 장두석 선생의 민족생활의학을 만났다. 어느 날 장 선생님이 그에게 “장(腸)에 뭔가 잡힌다”고 했다. 50대 중반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민간위탁이란 비수와 싸우며 조직을 만드는 험난한 시기였다. 단식과 생식, 풍욕으로 스스로 치료했다.
 
풍찬노숙의 시간 속에 김헌정은 2005년 여름 몸이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2008년 4월 홍희덕 위원장을 국회에 입성시킨 뒤 노조의 일상활동에서 비켜섰다.
 
2010년 4월 29일 김헌정은 민족생활학교에서 만나 현관 스님이 있는 남해 중생사로 혼자 내려갔다가 5월 4일 새벽 숨졌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전 조합원이 임금에서 매달 1천원씩 공제해 기금을 만들어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는 분들의 자녀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의정부 회룡역 근처에 ‘행복한국수’집을 열어 봉사하면서 수익은 이주노동자와 장학금으로 쓰고 있다. 김헌정의 아내 양미경은 지난해부터 이 국수집 대표로, 주방장은 고 김경영 씨의 부인 이정자 씨다. 김헌정은 이렇게 죽어서 ‘별’이 됐다.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나의 형제 김헌정>(박미경, 매일노동뉴스, 2013.5,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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