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에겐 진보적 자극을, 진보엔 경쟁적 자극을

언론이 지면을 구성하거나 방송을 편성하는 일는 가장 중요한 보도행위다. 언론은 어떤 대상을 집중해서 다루거나 애써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옹호와 공격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지난 6월 하순 공히 한겨레와 경향이 가장 주목한 인물은 정치학자로서 최근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펴낸 최장집이다. 그가 안철수 의원의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이 되고 ‘노동 있는 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신당의 밑그림을 제안한 대목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어려운 이념문제였지만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루지 않는 언론이 없다. 특히, 지면 한 개를 통째로 털어 수차례 보도하기를 마다 않고, 정성스런 와이드 인터뷰를 보도한 경향과 한겨레의 관심은 그중 각별했다.

- 진보-보수 모두에게 불편한 등장
 
관심은 꾸준했다. 경향은 5월 이후 기사에서 최장집을 26번 언급했고, 한겨레는 22회 언급했다. 반면 조중동은 평균 10회 이내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짐짓 그 존재와 주장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참세상, 레디앙, 민중의 소리도 최장집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으며, 내놓은 분석기사는 비판 일색이었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 모두 불편한 내색을 하는 것은 최장집이 제기한 화두 “노동 있는 민주주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보수야 노동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워낙 알레르기 반응을 하기 마련이지만, 진보운동진영은 다소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 중 민중의 소리의 촉수가 가장 빠르고 예민했다. 6월 4일자 ‘기자의 눈’을 통해 “안철수의 어디가 노동중심적인가?”라면 비판적 질문을 던졌다. 특히, 최장집을 가교로 진보정의당과 안철수 신당을 묶으려한다며 경향의 보도에 조직적 예민함을 드러냈다.
 
“이 신문은 대선 이전부터 안철수 후보가 주도하는 신당 창당에 우호적 시각을 보여 왔고, 이대근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최 교수의 제자이자 '최장집 사단'으로도 통한다. 또한 최장집, 이대근 두 사람 모두 오랜 '심상정 지지자'로 진보진영과 관련해 '노동 중심'을 타이틀로 하는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해왔다. 즉 안철수 신당과 심상정 의원 등을 묶어 제3의 정치세력으로 띄우고자 하는 의도가 읽힌다.”
 
틀리지 않는 지적이다. 경향의 인맥이 최장집 및 진보정의당과 닿아 있으며, 최장집 학파로 일가를 이룬다는 사람들이 경향의 주요 오피니언그룹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이유로 경향의 불편부당함에 대해 민중의 소리가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면 민중의 소리가 솔직히 그럴 위치는 아니지 싶다. 민중의 소리의 초점은 ‘노동중심’에 대한 점유권이다. 민중의 소리는 주로 안철수의 과거와 노동 사이의 거리감에 비판의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 진보정의당이 남의 다리를 긁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분명 안철수의 과거는 노동과 확연한 거리감이 있고 최근까지도 노동의 노자도 몰랐을 것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철수의 왼편에 자리한 최장집의 주장이나 역할을 무시하고 섣불리 진보정의당과 연결시킬 일은 아니라고 본다.
 
레디앙이나 참세상도 최장집의 역할에 대해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참세상은 거의 관심이 없고, 레디앙은 기고글을 통해 관심을 나타냈다. 그 기고글에서는 최장집의 한계에 대해 “ 방법론적인 점에서 보면, 최장집 선생의 근본적 문제점은 정치를 분석함에 있어서 경제가 지닌 효과를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유념해 둘 비평이다. 최장집은 정치학자이고 정치적 관점으로 노동에 접근한다. 그런 이유로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에 대한 분석과 도전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최장집 선생의 관점에서는, … 한마디로 말해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정리는 과도해 보인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냐 아니냐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방식의 차이다. 최장집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실생활을 개선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이라고 보고, 이를 위한 제도적 대의기구로서 정당을 중요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최 교수가 민주주의를 ‘정당민주주의’로 한정함으로써 대의제 외의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가능성, 정당 바깥의 사회운동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는 비판도 주요하게 제기됐다.”는 (한겨레)보도내용이 논쟁점이라 할 수 있다.
 
- 안-최 융합의 도전과 응전
 
사실 ‘대의민주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도 당장의 쟁점도 아니다. 그러한 문제는 안철수와 최장집의 융합을 비평함에 있어서 매우 성급한 미래다. 문제는 융합의 가능성과 융합의 파급력이다. 최장집 스스로가 인정하듯 마치 노동과 안철수의 거리감처럼 자신과 안철수와의 거리감은 명백하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안철수의 생각이 아직도 형성 중이라는 최장집의 말이 사실이라면, 안-최 융합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최장집이 말하는 ‘노동중심’이 안철수의 파급력을 타고 대중성을 발휘한다면, 보수는 물론 진보운동에게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중흐름에 민감한 언론의 촉수가 쏠리는 것은 안-최의 융합이 어딘가 대중적 흡입력이 있음을 상징한다. 만일 이 상징적인 융합이 힘 있는 정치대변자와 소박한 변화를 갈구하는 노동대중을 휩쓸어 간다면, 진보운동진영은 짝 잃은 원앙이자 결국 셋방살이 정치세력으로 퇴락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안-최의 융합을 비토하고 볼 일도 아니다. 정치가 ‘노동중심’을 화두로 경쟁하고 활성화된다는 것은 분명 노동대중들에겐 이롭기 때문이며, 현 시점에서 노동중심의 사회시스템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분히 진보적이다. 최장집이 안철수에게 “진보적 자극이 되겠다.”고 한다면, 진보진영은 이 융합을 경쟁적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유익할 것 같다.
 
변혁적 노동정치의 분발이 필요하다. 노동정치운동은 “의회주의를 넘어서자”며 제도권 활동에 무관심하다. 그러면서 정작 그 활동은 제도에 묶여 있다. 선거주의를 넘어서자며 일상영역에서 노동정치를 강화하는 것은 가야할 길이지만, 싸잡아 의회를 무시하는 것은 무능을 자초한다. 대중운동은 생명이지만 의회 밖의 대중들과 긴밀한 것도 아니다. 노동운동의 대중성은 더욱 왜소해지고 노동정치 또한 노동자들을 생활인이 아닌 변혁주체로 규정하는 신념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아무리 소외된 노동집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변혁적 일상을 살지 않는다. 그런 대중들과 융합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을 개선하고 평범한 감성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 제도의 활용도 필요하고, 언론 등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한 상호교감이 중요하다.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는 활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인류 역사의 성과이자 노동중심적 이념인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향하되, 증명된 적 없는 사회주의의 원칙을 앞세우고 고집할 일이 아니다. 경향으로서의 추구와 원칙으로서의 고수는 태도의 차이가 크다.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대중들과 소통하며 이념적 방향을 추구해야 길을 찾는다. 그 지난한 역사 속에서 변혁은 기획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대중들과 함께할 세력이 노동운동 속에서 탄생하길 바랄 뿐이다.
 
- 박성식/ 민주노총 임금고용사회공공성사업팀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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