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식 민주노총 부대변인

국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이 보수 기독교 집단의 반발로 철회됐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인종, 출신지역, 출신학교, 임신 또는 출산,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 예방하는 법이다. 그저 상식일 뿐이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계는 이 법안이 동성애를 부추기고 종북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이유를 들이대며 저지했다. 왜들 저러는 걸까? 그러한 설교를 듣고 간절히 “아멘!”을 외칠 신자들을 떠올리면 예수님만 불쌍하다. 여기 21세기에서 이러시면 안 되는 거다.

물론 그들이라고 사람의 인권을 전면 부정하고 모든 차별을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들은 동성애자와 반정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물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신을 믿는다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가장 강렬한 편견과 적대감을 발견할 때면, 종교에 대한 회의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개의 인간, 즉 현실적․육체적 인간의 제한에서 분리돼 대상화된 것”이며, “신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개인과 구별돼 다른 독자적 본성으로서 직관되고 존경된 것”이라고 했지만, 앞서 언급한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엔 종교의 본질 이상으로 강한 정치가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도 아주 편협한 정치.
 
- 바티칸의 노동절
이러한 정치적 종교가 벌이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바로 전쟁이다. 인류가 벌여온 전쟁 중 상당수는 신의 이름으로 치러진 종교전쟁이다. 거대한 악행에는 명분이 필요한데, 갖다 붙이기 나름인 신의 권위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특히 옳고 그름의 구조를 갖는 서양의 종교는 연관설과 윤회사상에 기반한 동양종교에 비해 적대감에 경도되기가 쉽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전쟁은 서양의 역사이다. 결국 종교는 정치다. 무엇으로든 집단을 이루면 정치가 시작된다. 그래서 독재정치는 시민들이 집단을 이루는 것을 막으려하고, 태생이 집단적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적대시한다. 그러나 정치에 민주주의가 있듯 종교에도 긍정적인 이념이 존재한다.
 
불교인권위원회는 지난 6월 3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든 것들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연기적 관계에 있으므로 어느 것 하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설한 부처의 가르침을 들어 “차별이란 땅과 물, 일체 생명을 살리는 햇볕이 자신의 존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음과 같다”고 했다.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일 노동절에 즈음한 강론을 했는데, “(인간)존엄은 권력, 돈,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엄은 노동에 의해 이뤄집니다. 개개인의 존엄에 있어 노동은 근본적입니다.”, “수지타산을 맞추거나 이익을 추구하며 일자리를 주지 않거나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 반하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 대한문을 지키는 신자들
한국에서도 천주교 주교회의의 정의평화원회 이용훈 위원장은 공식적인 노동절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의 메시지는 절로 두 손을 모으게 한다. “노동의 문제가 특정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 전체의 ‘본질적인 핵심’이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공동의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 자본은 있지만 ‘인간’이 없고, 이윤은 있지만 인간다움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사라진 형국입니다. … 교회는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교회는 노동자들의 품위를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신성하고 불가침한 것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발길이 뜸해지고 경찰에 의해 짓밟힌 대한문 분향소를 매일같이 지켜주는 것도 천주교 사제들과 신자들이다. 그들의 한결같음을 보노라면 부끄러울 지경이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지만, 종교적 소명은 세속과 인지상정 너머에 다다르는 또 하나의 길임을 느낀다. 또한 저항에 대한 성찰도 새겨 봄직하다. 나승구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신부는 “이기는 싸움에 앞서 사는 싸움을 하시면 좋겠다. 무엇을 쟁취하거나 이기려는 싸움에만 전착하지 말고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완성되는 싸움”, 그러면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사실 노동도 노동운동도 척박하던 시절, 종교는 노동자에게 큰 버팀목이었다. 명동성당이 그러했으며 개신교계의 도시산업선교회도 그러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70년대 이후부터 노동자들이 세상을 접하고 현장의 문제를 인식하는 중요한 공간으로서, 노동조합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 중 전태일 열사의 사후 수습을 도맡았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그러나 종교가 늘 노동자의 곁에서 친구가 돼준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태동기 종교, 특히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팽창하는 산업에 노동력을 투여하기 위해 국가는 구빈법이란 명분으로 토지에서 쫓겨나 떠도는 농민들을 공장에 밀어 넣었듯, 프로테스탄티즘은 노동을 신성한 의무로 여기며 근면을 칭송했다. 그 영향으로 휴일이 줄었고 심지어 종교개혁 이후 한 때는 크리스마스조차 휴일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21세기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위협이 횡행하지만, 1835년엔 ‘노동천국 태만지옥’이 횡행했다. “일터에서 태만하게 군다면, 단순한 해고를 넘어서 지옥의 불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앤드류 우어라는 프로테스탄티즘 작가의 말처럼 당시의 노동은 천국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노동조건의 혹독함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도피하듯 로마를 떠날 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나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내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라고 대답했다는 성경구절이 있다. 한국교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과연 저 거대한 성전들은 신의 집인가 권력에 취한 사람들의 집인가? 마틴 루터는 “게으른 자의 머리는 악마의 일터”라고 경계했지만, 근면해도 빈곤과 차별을 면하기 어려운 이 냉혹한 자본주의사회에선 자본의 머리와 일부 대형교회야말로 ‘악마의 일터’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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