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를 둘러싼 과감한 표현과 성에 대한 중추적 해석

인간의 쾌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성기인가, 피부인가. 아니면 쾌락중추인 뇌인가. 성기를 거세함으로써 욕망이 거세될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하면서 치명적이다. 남성이 거세되는 순간, 쾌락은 또 다른 방안을 찾기 때문이다. ‘온몸이 성기’라는 또 다른 쾌락의 중추가 대신한다. 거세를 당해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피부에 각인돼 있는 셈이다. 욕망과 쾌락의 분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이어지는 순간이다.

영화 ‘뫼비우스’가 상영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에 나왔다. ‘뫼비우스’는 스토리부터가 충격적이다. 남편의 외도에 분노한 아내가 그 복수로 아들의 성기를 자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속죄의 의미로 결국 자신의 성기를 잘라 아들에게 이식을 한다. 하지만 가족 관계는 치유되지 않고 더 치명적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와 엄마, 아들이 이식된 성기를 둘러싸고 존재론적 회의와 갈등으로 결국 파국을 낳고 만다.

끝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는 결국 윤회되는 성과 가족관계의 상징이다. 거세로 사용된 칼을 덮고 있는 불상이 바깥으로 나온 마지막 장면은 참회와 해탈의 경지를 생각게 한다. 이 영화는 특히 한마디의 대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사 없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음은 김기덕 감독의 힘이다. 보지 않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영화인 셈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한참 여운을 주게 하는 이유다.

성욕을 가족이라는 인간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대입시킨 영화 ‘뫼비우스’. 아들을 향한 부성애도, 모성애도, 남편을 향한 질투도, 나아가 내연녀와의 관계,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까지 모두 그 '욕망' 안에 그리고 있다. 결국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되고, 그 욕망을 한 번 맛들이게 되면 절대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와 가겟집 처녀(내연녀)를 함께 연기한, 1인 2역이라는 방식도 성욕에 대한 ‘뫼비우스의 띠’를 극명히 연결시킨다.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엄마에 대해 품는 무의식적 성적 애착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케 한다.

직계가족 간 성관계를 다뤘다는 이유로 두 차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영화 ‘뫼비우스’는 세 번째 심의를 신청해 논란을 낳았다. 국내 상영관 심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뫼비우스’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됐고, 해외 유력지인 버라이어티가 선정한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151편의 작품 중 꼭 봐야 할 영화 TOP 10’으로 선정되기도 해 화제를 모았다.

강상철 ksc00013@nate.com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