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성식 민주노총 사회공공성본부 국장

철도노조 파업이 한창인 시기, 민주노총과 철도노조는 철도민영화 사태에 대한 5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12월 14일을 1차 시한으로 박근혜 정부의 응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역시 침묵의 상징 박근혜 대통령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민주노총과 철도노조는 파업투쟁을 강화해 정부로부터 대화를 끌어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한 밤 대책회의에서 한 동지가 희생을 불사한 분노에 찬 선도투쟁을 제안했다. 일종의 충격전술로서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가 없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철도노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상을 넘어 시민들의 파업 지지가 높아가는 지금은 수세적 선도투쟁을 쓸 시기가 아니며, 시민대중의 지지의 힘으로 대중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철도노조의 판단이었다. 분노에 찬 선도투쟁 제안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스스로 결기를 끌어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철도노조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했으며, 우리는 어찌하면 더 대중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 분노하고 싶지 않다
노동운동을 해가면서 분노라는 정서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늘 밀리고 빼앗기며, 부당한 통제와 억울한 누명을 써야하는 노동운동 판에서 분노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2011년이었을까? 영화배우 김여진씨는 애정을 담아 민주노총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조노총은 늘 화를 내고 있잖아요.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지만, 늘 화를 내는 사람 곁에 다가서기는 쉽지 않습니다.”라고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할지는 모른지만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분노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과 투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감정일지 모른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시쳇말은 분노가 경쟁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처세술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고백하건데, 분노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분노하라는 촉구는 불편할 때가 많고 일종의 스트레스까지 불러일으킨다. 분노로써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갖게 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상대가가 경쟁과 대결의 대상일지라도 사람에게 그러기란 나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집회 연단에서도 너도나도 쏟아내는 분노의 찬 연설보다 낮은 목소리와 한 줄기 눈물이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사람이 그렇게 유약해서 투쟁하겠냐는 냉소를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태생이 그런가보지.
 
그러나 나에게도 분노는 있다. 날카롭게 약점을 건드리면 수긍하기에 앞서 발끈하여 달려들기 십상이고, 지나치다 싶은 공권력의 태도 앞에선 악다구니를 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낯설기도 하지만, 나 또한 보통사람이기에 치미는 분노가 어찌 없을까 싶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에 넘치는 분노는 꽤나 불편하다. 논쟁을 투사의 소양으로 여기며 공격적 관철을 능력으로 여기는 것 같고, 투쟁의 시기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변절의 피가 흐르는 회색인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자격지심마저 든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이맘때쯤 자살한 후배가 있다. 울산에 살던 후배는 자살 후 노동열사로 추서됐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에 앞장서며 몸과 맘이 망가진 후배는 투쟁의 후유증으로 스트레스성 장애를 앓은 것 같다. 아직도 흔들리는 후배의 눈동자와 방에 틀어박혀 자책하던 모습이 선하다. 후배는 자신의 이해관철에 늘 어눌했으며, 공격적인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바보스러울 만큼 분노할 줄 몰랐다. 착하기만 한 후배에게 비타협적 원칙에 따라 분노하고 더 분노해야 하는 투쟁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된다. 반면, 수년을 한 결 같이 버텨 온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을 보면 일종의 존경심마저 들기도 하지만, 분노결핍을 앓고 있는 나는 역시나 다가서기가 힘들다.
 
- 누구에게 분노하고 계신가요?
특히나, 몇몇 노동운동 내부에 비판과 비난이 난무하며 서로를 증오하는 모습은 너무도 안타깝다. 각자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기준으로 상대를 규정하여 비난하는데, 매우 획일적이고 공격적인 조직문화가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회운동은 대중의 일상적 감성과 소통해야 성공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분노란 필요하지만 일상적 감정일 순 없다. 일상적으로 분노를 달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피폐화시키며 주변의 기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멀리 있고 거대한 적일수록 희망을 향한 도전과 창조적 열정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혁명 또한 분노보다는 대안과 희망으로 영그는 열매가 아닐까 싶다. 분노란 그렇다. 강자에게 향하기보다는 만만한 상대에게 들이대기 십상이다. 추상적인 불의에 표출되기 보다는 가까운 불편에 폭발시키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술주정과 화풀이가 그렇고, 부부 간에 또는 자식이 부지불식 터뜨리는 부모에 대한 폭언과 짜증이 그렇다. 회사가 원인이지만 동료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감정이 그것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또 그렇다.
 
그러나 한 때 날개 돋친 듯 팔렸던 책,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에 따르면 내가 우려하는 분노란 일종의 격분이거나 증오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노에 의한 ‘평화로운 봉기’를 촉구한다. 반면, 그는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으로 규정하며 도에 넘치는 분노를 경계한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며, 격분 탓에 희망을 놓쳐버릴 수 있다고 충고한다. 또한 증오가 너무 쌓이면 폭력을 유발하는데, 분노하는 사람들은 폭력보다는 비폭력의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고 권한다. 과연 어떻게 분노해야 희망을 내쫓지 않으며, 어떻게 분노해야 대중과 더불어 봉기할 수 있을까? 소금이 과하면 독이 되듯 분노도 과하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노동운동에도 분노뿐 아니라, 해학과 여유, 낭만과 욕망의 균형이 허용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시위를 벌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를 ‘비폭력 테러리즘’이라며 왜곡시키고 억누르는 이스라엘 정부처럼, 반체제운동을 무조건 ‘폭력’, ‘종북’으로 규정해 척결하려 하는 한국정부의 모습을 보면, 분노든 격분이든 아낄 필요가 없을 듯도 하다. 지치고 짜증나는 하루하루를 보내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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