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아름다운 재단이 함께한 ‘2013년 비정규노동 수기공모전’ 당선작입니다.

14년 전, 18세 나이로 사무직 3명 현장직 3명 사장 이렇게 7명으로 이루어진 가족 같은 공장에 취직하게 됐다.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갔고 배운 것이라고는 직업전문학교에서 교육받은 기계조립이 고작이었다. 일하다 자제에 손가락이 끼여 손을 다쳐 피가 나도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뿐 다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산재보험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나이였다. 어린 나에게 참을 수 없었던 창피함은 기름때였다. 손톱에 낀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름때 때문에 손을 꺼내기가 창피했다. 지금도 버릇이 남아 손톱 깎을 때 바짝 깎는다.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느낄 때도 있었고, 대학이 가고 싶었기에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위해 다시 돈을 벌어야했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친구 녀석이 “대기업에 다녀 볼래?”라는 제안을 했다. 대기업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취직한 곳이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였다.

2시간 일하고 10분 쉬고, 12시에 밥을 먹는 자동차 공장은 학교 같았다. 1시간에 자동차를 52대를 만들었고, 단순 반복 작업을 52번 해야 했다. 일이 힘들어 쉬고 싶어도 멈출 수 없었다. 워낙 힘들고 멈출 수 없는 일이기에, 취업 준비 중인 고등학생들은 다음날이면 회사를 나오지 않기도 했다.

매일 일하는 사람들이 바뀌다보니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회사에 불만이 쌓여갔다. 정규직과 협력업체 직원들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힘든 일도 협력업체 직원들이 하고, 대우도 달랐음을 알았다. 정규직 직원들은 일을 하다가 화장실을 갈 수 있었지만 협력업체 직원들은 주어진 휴식시간 10분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정규직 직원들과 다르게 협력업체 직원들은 불량이 나면 관리자에게 욕을 듣고, 시말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던 중 5명이 하던 일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3명에게 일을 시킨 것을 본 후 화가 나서 일부러 불량 차를 만들었다. 라인이 멈추고서야 어디선가 사람이 나타났다. 조장이랑 욕하며 싸웠고, 그 후 지각을 한번 하자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 해고를 했다.

더러워서 안다닌다며 다른 협력업체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2년을 협력업체를 전전했지만 다 똑같았다. 누나 결혼식을 가기위해 조퇴를 하겠다고 하면 욕부터 하던 시절이었다. 상여금 600%는 수습기간을 거쳐야만 받을 수 있었고 수습기간이 끝나기 전 해고하거나 재계약을 해서 상여금을 주지 않기도 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다시는 다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백수생활을 하다 연애를 하고,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자 생계문제가 다시 다가왔다. 1년만 벌다가 옮길 생각에 다시 자동차로 들어갔다.

자동차를 다시 입사하고 바뀐 건 정규직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였다. 정규직은 협력업체 직원들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불량이 나면 정규직이 먼저 와서 욕을 하고 혼내기까지 했다. 이제는 정규직이 하는 욕도 참고, 관리자들이 하는 욕도 참아야 했다. 서럽고 화가 나서 울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참고 살아야 했다.

회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도 필요했고, 육아에 들어가는 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월급 100만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세 집을 구하기 위해 은행 대출을 고민했지만 3년 넘게 다닌 회사가 원청회사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업체 사장이 바뀌고 회사명도 변경되었기에 대출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급한 김에 제2금융을 통해 대출을 받았고, 이자를 은행권 보다 더 많이 줘야했다. 이자가 월세를 낼 때보다 더 많아져 버렸다. 상상을 초월한 빚을 카드와 사금융 돌려막기로 막아가며 겨우 살았다.

그 무렵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생겨났다. 노조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필요하다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했다. 노조는 잔업특근 강요와 항상 따라 다니는 고용불안을 해결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노조에 가입했고, 출투와 집회를 참석했다. 투쟁을 하던 중 회사에서 면담을 하자며 노조를 하지 말라했다. 해고와 구속을 들고 나를 구슬렸지만 청개구리 마음으로 더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자 회사는 집에 찾아와 아내에게 협박 비슷한 부탁을 하더니만 급기야 정규직이었던 장인에게까지 찾아가 노조를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인은 나에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고용방패막을 위해 회사가 고용한 인원이라며, 노조 할 거면 이혼하고 하라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 후 아내와의 싸움이 많아졌고, 하루도 편하게 지내는 일이 없을 정도로 살아야 했다.

그러던 2004년 노동부로 부터 현대자동차 109개 업체 불법파견 판정을 받게 되었다. 노조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하면서 잔업거부를 했다. 2005년 투쟁과정에서 한 명의 노동자가 목을 매고 자결했다. 그 계기로 3명의 노동자가 철탑에 올라갔고, 그 투쟁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정직 3개월을 받았다. 처참히 깨지는 싸움을 했지만 즐거웠다. 혼자서 회사와 싸우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분노하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이 희망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이기겠다는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직 이후 돈을 벌어야 했고 노조는 정직자들을 책임질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일용직 노가다를 하게 되었다. 어떤 날은 14층 높이의 건물에서 일했고 어떤 날은 굴뚝 안에 들어가 산소마스크를 끼고 일을 했다. 자동차 다닐 때보다 돈은 많이 벌었기에 아내의 눈치를 덜 보긴 했지만 정말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직이 끝난 후 2006년, 정리해고 이야기가 소문처럼 돌기 시작했다. 아내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자고 했고, 나는 5년을 다녔는데 해고 되는 건 억울하고 분하다며 싸우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싸울꺼면 이혼하고 하라고 할 정도로 확고했고, 아내를 설득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정리해고가 진행됐고, 108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나를 포함한 40여명의 조합원들이 휴게실을 점거하고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함께 했다. 1공장 2공장 시트를 돌며 관리자들과 몸싸움을 했다. 결국 75일간의 투쟁으로 12명이 원직복직 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인원들도 원청에서 신규업체를 만들어 그 곳에 복직했다. 복직 합의안을 만족할 순 없었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난 아내를 설득하지 못했고 이혼을 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아이의 양육을 부탁해야 했다. 낯설고 적응 못해 울던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나의 고집이 이런 일을 만들었나 싶은 자책도 했다. 그렇게 나의 생활은 하루하루 망가져갔다. 때 마침 교통사고를 당하고 돈을 벌지 못한 탓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끊었던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제대로 된 노조를 만들어 보고 싶었고 힘 있는 노조를 만들고 싶었던 나의 열정은 현실의 벽 앞에 좌절되었고, 원청의 사용자성 부정과 지회의 좁아진 활동은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그 때 원청 관리자들이 찾아왔다. 원청관리자들은 정규직 활동가를 동원해 술 먹는 자리를 만들었고, 밤놀이 문화에 빠져 있던 나는 거절 하지 못하고,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원청 관리자는 친해지자 노조 회의 내용과 조합원 명부를 요구했고, 나는 회의 내용을 메일로 보내줬다. 그러자 관리자는 회의 내용에 누가 무슨 말을 했고 결정난건 무엇인지 정리해서 달라고 했다. 그것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원청관리자는 회의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리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얼마나 대접을 잘해주는지도 궁금하고, 정신 못 차릴 때 물주 만난 것처럼 시작했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왔다. 내 한 번의 실수가 목을 매고, 목숨을 던지고, 머리가 터지면서까지 노조를 지키고자 했던 조합원들에게 누가 될까봐 겁이 났고, 도망치고 싶었고, 숨고 싶었다.

2010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 인정되면서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우리는 집단 소송을 진행하고, 정규직 전환을 위한 싸움을 준비했다.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으로 시작된 싸움은 1공장 CTS점거파업으로 이어 졌고 25일간 점거파업을 하게 되었다. 3공장 조합원들은 1공장 점거파업 침탈을 막기 위해 3공장 자체적인 파업을 진행했다. 원청관리자는 회의내용과 파업시간, 파업방식을 알기 위해 매일 같이 전화했고 난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단호히 거부했다. 라인을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조합원들과 함께 웃으며 정규직이 되자며 25일간 투쟁을 했다. 25일간 점거투쟁을 했지만 현대자동차를 넘을 수 없었다. 정규직노조 또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용역경비와 싸우다 병원에 실려 갔던 조합원들은 점거를 풀면서 25일간의 배고픔과 추위를 함께 견뎠던, 함께 울고 웃었던 이들이었다. 투쟁이 끝나고, 비정규직노조는 집행부를 세우지 못했고 회사는 나를 포함해서 50여명을 해고하고, 1,000명을 중징계 했다. 해고되기 직전까지 원청관리자의 전화는 계속되었다.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며 살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을 수 없었다. 더 양심을 속이기 싫었다. 그래서 이후 나는 투쟁을 외면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았고, 미안함에 숨고 싶었다. 한 달을 넘게 집에서 아이와 놀며 다른 직업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고 같이 해고된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에게 욕을 하며 도망치냐며 혼을 냈다.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돌아 다녔고, 예전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노동조합 발기인이 되고, 현장위원과 대의원 부지회장까지 하게 되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열정적으로 했던 순간과 회사 관리자들과 연관된 일들이 교차되면서 쉽게 결정 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고 함께했던 동료들 앞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4년간 웃고 울고 싸우며 지낸 형이 나를 붙잡아주었고, 포기했던 마음을 돌리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망치지 않고 욕먹을 것은 먹더라도, 다시는 실수 하지말자고 생각하며 한 달 반 만에 투쟁에 복귀했다. 워낙 회사가 큰 탓에 같은 해고자끼리도 얼굴을 잘 모르는 사이였고, 한 달 반의 공백으로 열심히 안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욕도 많이 먹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투쟁했다. 그리고 지금, 3년 가까이 해고자들과 지지고 볶으며 투쟁하고 있다. 복귀할 당시의 마음처럼 잘하진 못했지만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듯, 나의 투쟁도 아직 꺼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 다시 시작이다.

 

 

 

박종평(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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