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보후가 된 두 남자 한상균과 김혁의 이야기, 소설로 출간

▲ 김혁 금속노조 정책기획실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내 안의 보루'가 출간됐다. 대우차 농성투쟁,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 한상균 지부장과 함께 한 쌍용차 평택공장 77일 파업투쟁이 이 책에 담겼다. ⓒ 변백선 기자
‘내 안의 보루’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그야말로 강철 같은 인물이다. 결단해야 할 때 가장 어렵고 낮은 곳을 선택해 달려갔고, 온마음과 온몸을 던져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실천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감옥살이를 한 노동운동가, 금속노조 정책기획실장이란 직책...

<노동과세계>가 김혁 금속노조 정책기획실장(53세)을 13일 금속노조서 만나 인터뷰했다. 최근 서로에게 보루가 된 두 남자, 한상균과 김혁의 이야기 ‘내 안의 보루’가 김혁 실장의 대학동창인 소설가 고진 씨에 의해 소설로 출간됐다.

“감옥에서 느낀 분노와 울분이 나를 바꿨다”

이 책은 2001년 대우자동차 농성투쟁, 2003년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투쟁, 그리고 2009년 77일 간의 쌍용차 파업투쟁에 이르기까지 세 번의 큰 싸움을 거치며 세 번 모두 구속됐고, 학생운동 시절까지 합쳐 여섯 번의 구속과 감옥을 겪은 김혁이란 인물의 삶과 투쟁을 소설 형식을 빌어 담고 있다.

김혁 실장은 보기만 해도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나 딱딱한 인상도 그런 외모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러운 힘이랄까. 조금 답하기 곤란하거나 무거운 질문을 던져도 그는 인터뷰 내내 따뜻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전 학생 때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비합시대였고, 엄숙하고 경건했죠. 선배들은 의식이 굉장히 강했고 이념도 투철했어요. 저는 그렇지는 않았는데 86년 1년 6개월 간 감옥살이를 하면서 바뀌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교도소가 정말 열악했고, 교도관들과 매일같이 싸웠죠. 그러다보니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 끓어올랐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커진 거에요.” 싸울 때마다 이기지 못했지만 지면 지는 만큼 스스로 분노와 의식이 커져갔다고 김 실장은 말한다.

‘내 안의 보루’가 만들어진 사연을 김혁 실장에게 물었다. “제가 쌍용차 투쟁으로 구속됐을 때 대학 친구인 고진이 관심을 가졌던가 봐요. 감옥에 있을 때 금속노조 한 후배가 면회를 와서 수기를 써보라고 할 때는 그냥 말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아주 특별한 삶을 산 건 아니지만 평이한 삶도 아니다 싶어 그때부터 일기를 썼어요. 그날그날의 일상뿐 아니라 그동안의 활동과 운동과정을 되돌아보는 글을 쓴 거죠.”

김 실장은 감옥에 있는 24개월 간 총 24권의 일기를 썼다. 출소한 후 그 일기를 친구 고진 씨에게 줬다. 고진 씨는 그 일기를 기초로, 한상균 지부장을 몇 차례 만나 인터뷰를 해서 이 소설을 썼다.

2009년 5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참모와 지도자로 만난 두 사람

김혁 실장과 한상균 지부장은 광주 기계공고 동창이다. 광주항쟁 때 그들은 시민군으로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다. 학교 때도 광주항쟁 때도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다른 삶을 살면서 나이를 먹었다. “쌍용차가 2,646명을 정리해고하기 전에 비정규노조가 떴고 대책을 세워야 했죠. 당시 제가 금속노조 미비국장이었고 미비특위를 열었는데 쌍용차지부 연대사업부장이 우리 지부장도 광주항쟁 때 거기 있었는데... 하는 거에요.”

두 남자는 자신들에게 그런 인연이 있었음을 김혁 실장이 2009년 5월 쌍용차 평택공장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됐다.

김혁 실장이 바라보는 한상균은 어떤 사람일까. “쌍용차 투쟁이 그렇게까지 커질 수 있었던 원인은 조합원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이 가장 큰 힘이었고, 한상균 동지의 지도력도 중요했어요. 현대차, 만도, 대우차 등 큰 정리해고 투쟁들이 있었죠. 마지막 결단해야 될 순간을 대부분 장이 짊어지는데 그 두려움과 하중을 견디기 힘들어요. 그런 점에서 한상균 지부장은 정말 지도자답게 대처했어요.”

한상균 지부장은 조합원들 앞에서 자신도 두렵다고, 하지만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싸우자고 했다. “보통은 ‘조합원동지들, 반드시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한상균 동지는 조합원들에게 대단히 솔직하게 다가갔어요. 또 중요한 순간 결단이 필요할 때도 잘했어요. 그런 지도자였어요.”

조합원대중의 자발적 투쟁력+한상균 지도력으로 쌍용차 77일투쟁 가능했다

조합원대중의 자발적인 투쟁력과 훌륭한 지도력이 결합돼서 쌍용차 77일 투쟁이 가능했다고 김혁 실장은 평가한다. “한상균 동지는 이제 한 사업장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을 이끌 위치에 섰어요. 스스로도 알 테고 어깨가 무거울 겁니다. 감옥에서 나와 한 달 만에 어쩔 수 없이 (철탑에) 올랐는데, 그 무게를 혼자만 지지 말고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김혁 실장은 친구이자 동지로서 삶을 함께 해 온 한상균 지부장이 오랜 고공농성으로 인해 나중에라도 건강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 치열한 싸움의 현장,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김혁 실장과 한상균 지부장은 서로를 지키는 보루였다.

“제가 쌍용차 투쟁 때 참모역할을 한 거죠. 사실 그 때는 매일같이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서로 의지가 된다거나 그런 여유조차 갖기 힘들었어요. 구속돼서 안양교도소에 같이 있었는데 사동은 서로 달랐지만, 서로 마주보는 건물 복도에 서서 큰 소리로 부르며 이야기를 나눌 때 정말 가깝게 느껴지고 서로 힘이 된다는 걸 느꼈죠.”

김혁 실장은 2년 간 감옥살이를 하다 출소돼 나올 때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형사사건 상고심에서 원심이 파기된 것은 그의 사례가 처음이었다. 법률가들은 이를 두고 시국사건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말한다. 다시 항소해서 3년이던 형기가 2년으로 줄어 그는 2011년 8월 6일 출소했다. “개인적으로는 감옥에서 나가니까 정말 좋은데 한상균 동지를 두고 가야 하는게 또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아픈지... 그런 묘한 감정을 경험했죠.”

어려울 때일수록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자

▲ 김혁 실장은 조합원대중의 자발적 투쟁력과 한상균 지부장의 지도력이 있어 쌍용차 투쟁이 가능했다고 전한다. ⓒ 변백선 기자
민주노총 앞에는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제들이 놓여 있다. “변혁방법론과 철학에는 일정정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봐요. 자기 철학과 계획은 다를 수 있는 거죠. 어제 금속노조 조직강화특위를 했는데 기업지부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곳이 있어 올해 9월까지 안을 만들고 대의원대회에서 논의키로 했어요, 이는 조직형식만의 문제가 아니고 산별투쟁과 산별교섭, 정치세력화 등이 모두 중첩된 문제인 겁니다.”

“그 중 하나로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평가도 있어요. 민주노동당이 전체를 포괄하진 못했지만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킨 건 사실이죠. 그걸 정치실천운동으로 연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선거 때 특정인물과 특정정당에 대한 관심으로 흘러버렸어요.”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민주노조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과 탄압이 계속되면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현장이 다 무너지는 상황에서까지 민주노조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까지도 갖고 있어요. 그 사람을 탓할 문제가 아닐 정도로 현장이 어려운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다시 출발해야죠, 모든 걸 원점에서 시작해야죠. 원점에 서서 진보정치운동의 전략을 어떻게 수립할 지, 일반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어떻게 고양해서 역할을 하게 만들 건지를 모색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정치적 시야 넓게 갖고 확장시켜야

“전 민주노총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봐요. 정치운동의 전반을 다질 기초돌, 디딤돌 역할을 하면 돼요. 실리주의가 판을 치고 전투적 노동운동이 다 무너졌어요. 정치적 사고고 조직을 지탱해주는 요인이고 힘인 거에요. 민주노총이 정치적 시야를 갖고 그 내용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해서 쓰여진 ‘내 안의 보루’를 조합원대중이 어떻게 읽기를 그는 바랄까. “제 후배가 이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렸는데 저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아 좋다고 했어요. 저는 일상적으로 닥치는 모든 것들에 치열하게 부딪치며 살았어요. 그런 삶이 큰 투쟁과 맞닿아 복합돼서 오늘까지 온 거죠. 지금도 늘 어떻게 넘어설지를 고민하며 끝없이 투쟁하며 삽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던 산곡성당에 들어가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빨리 먼데로 도망가라고 했다. 당시 김혁 실장은 수배 상태였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도망을 가야 하나? 설혹 싸우다 잡혀가더라도 산곡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맞나? 대중과 함께 하자고 저는 결단을 한 거죠.”

김혁 실장은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 올 때마다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이 책을 읽는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삶을 살기를 그는 바란다.

운동정신 후퇴한 채 현장에 실무적으로 접근하는 후배들 안타깝다

50대 초반에 들어선 노동운동가 김혁 실장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젊은 친구들이 너무 실무형으로만 가는 게 저는 불만이에요. 조직이 요구하는 실무로만 현장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활동가는 실무도 중요하죠. 반면 운동정신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후퇴해 있어요. 그런 게 아쉬워요.”

현장과도 기능적 관계로 다가가는 것 같다고 김혁 실장은 지적한다. “전면적인 삶과 삶의 관계 보다는 형식적 기능적으로만 연결되는 게 안타까워요. 운동이 뭔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치열하게 부딪쳐야죠. 오랜 기간 운동을 한 사람들은 이 전면적인 관계가 어떤 건지를, 요즘 얼마나 얕은 관계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알 겁니다.”

김혁 실장은 이주노동자들과 1년 간 농성투쟁을 진행한 후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살았다. “1년을 같이 농성을 하니까 제가 이름만 상황실장이지 이주노동자들 아빠가 됐고 형이 돼 있더라구요. 처음 접하면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고 함께 한다는 게 편치 않죠. 그런데 그들의 절박함을 우리가 어떻게 같이 해결하기 위해 싸울지를 고민하며 싸워야 하잖아요.”

참된 마음으로 평생을 노동운동에 전념해 온 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후배 노동자들에게 김혁 실장은 여전히 투쟁하는 노동자이자, 치열한 저항의 삶을 살아가는 선배다. 우리 사회에는 누구나 갖지는 못하는, 흔치 않은 고귀한 품격과 인성을 갖춘 노동운동가들이 있다. 그들은 치열한 삶과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꿔왔다. 민주노총을 소중히 여기며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김혁 실장. 민주노총도 그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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