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칼럼] 미디어오디세이<8>

 오늘(3월26일)은 천안함이 침몰한 지 4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그런데, 천안함은 과연 정부의 공식 발표대로 북한의 잠수함 공격을 받아 ‘폭침’된 것일까?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 소통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어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이미 구조화된 언어의 세계 안에서 사고하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이 인격화되어 인간을 지배하듯이 언어도 신과 같은 존재인가? 물론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언어를 콘트롤하는 존재가 있어서 그들이 나머지 인간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다. 바로 천안함 ‘사건’을 ‘폭침’이라고 딱지를 붙인 자들이다. ‘침몰’과 ‘폭침’은 천지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메두사 호의 뗏목>이라고 하는 기념비적인 그림이 있다.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J.L.A.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1819년에 그린 작품이다. 제리코는 승마 매니아로서 말 그림의 묘사가 뛰어났고, 그리스 독립전쟁이나 노예제 반대 등 미술을 통한 사회적 발언에서 돋보였다. 말을 타다 떨어져 투병중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 <메두사호의 뗏목> 491×716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제리코(1791~1824) 1819년 作

당시는 철학이나 예술 사조에서 신고전주의가 퇴조하고 낭만주의가 유행하던 때였다. (신)고전주의는 그리스의 이상향을 추구하며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경향인데 반해 낭만주의는 그에 대한 반발로서 인간의 감성과 욕망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중상주의 시대를 거쳐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온갖 사회문제들이 분출하면서 이성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아름답지 않은 욕망이 충돌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회화에서 제리코는 그 선봉이었으며, <메두사의 뗏목>은 낭만주의 확립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면 먼저 메두사 호는 무엇인가? 메두사 호는 괴물의 이름만큼이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왔다. 나폴레옹의 몰락이 가져온 부르봉왕조의 복위로 왕좌에 오른 루이 18세 시기에 해당하는 1816년 메두사 호는 392명의 승객을 태우고 프랑스의 식민지 세네갈로 향했다. 세네갈은 1444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처음 유럽에 노출되어 무역의 대상이 되었다. 중상주의 시대, 무역을 통해 부를 확보하여 왕실과 국가의 재원으로 삼던 시기의 산물이다. 중상주의는 노예무역도 수반했는데, 세네갈에는 이 무렵부터 300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으로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Goree라는 이름의 노예섬이 있다.

중상주의의 논리는 간단하다. 장차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태동하는 배경이기도 하는 무역차액설이다. 국내 생산을 독려하여 수출을 많이 하고 수입을 제한하는 한편 무역을 독점하는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당연히 국가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게 되어 있다. 포르투갈이 독점하는 세네갈 무역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의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결국 1816년에는 프랑스의 차지가 되었다.

이 해에 프랑스 정부는 식민(植民)을 위해 정착민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상주의의 핵심적 목적 중 하나인 금의 탈취를 위해 귀족들이 메두사 호를 지휘했다. 프랑스는 이에 앞서 1636~59년 사이에 세네갈 강 어귀에 있는 작은 섬을 점령하여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생루이’ 섬이라고 명명하고 프랑스군의 요새를 건설한 바 있다. 메두사호의 항해 목적지는 바로 이 생루이 항이었다.

메두사호의 함장은 왕당파 귀족 출신으로 항해 경험이 없는 쇼마레였다. 그는 암초지대를 무리하게 질러가다 결국 얕은 바다의 모래톱에 걸려 좌초하고 말았다. 쇼마레는 장교와 귀족들을 구명보트에 태우고, 가로 7m 세로 20m의 뗏목에 올라탄 149명을 따돌리고 줄행랑을 쳤다. 쇼마레는 함께 출항했던 소형 범선 아르구스 호를 좌초지역으로 보냈는데, 9만여 프랑의 금화와 은화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뗏목이 15일간 표류하는 사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15명이 생존한 상태에서 나중에 아르구스 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러나 5명은 생루이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고, 살아 돌아온 두 사람이 증언한 15일간의 참상이 신문에 보도됨으로써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제리코는 증언을 듣고, 시신들을 확인하고, 뗏목을 만들어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등 치밀한 준비와 습작과정을 거쳐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에서 보면 이미 생존자가 몇 남지 않은 상황에서 죽은 사람들,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노인, 인육을 먹는데 사용된 도끼, 멀리 아르고스호의 돛대를 발견하고 옷을 벗어 흔드는 사람들,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한 장면.

부(富)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은 발전의 원동력이며,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기심이 충돌하지 않고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충돌로 시대착오적 철학이 되었다. 이것이 낭만주의의 한 배경이며, 제리코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폭발하는 감성의 측면을 포착했던 것이다.

중앙일보는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폭침’으로 몰고 갔다. 이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가세했고, 신중하던 이명박 정부와 미국 정부가 동조하면서 북한의 참여의사를 묵살하면서 정부주도의 조사로 ‘추측보도’를 사실로 인정해주었다. 여기에 합리적 인간의 이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황금을 쫓는 현대판 귀족들의 탐욕만 이글거릴 뿐이었다.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제리코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시나 그림은 결코 이 뗏목에 탄 사람들의 두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한다”고 했다. 천안함도 마찬가지다. 뿐만이 아니다. 한 나라의 함장도 무자격자가 사리사욕이 앞서 핸들을 잡으면 죽어나는 건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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