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 30일 오전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비자림로에 진입했다. 도착지는 사려니 숲길. 제주도민들이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꼽고 있는 사려니 숲길을 걷기위해 온 관광객들로 진입로인 비자림로를 메웠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4.3 역사기행단도 이 길을 걸었다. 10여분간 걸었을까 사려니 숲길을 비켜나 기행단은 한라산을 향해 산행에 돌입했다. 길을 분간하기 어려운 길을 인솔자를 따라 계곡을 건너 도착한 곳은 4.3 당시 한라산 유격대의 제2대 총사령관이었던 이덕구가 머물렀던 그곳. 이덕구 산전이다. 1949년 이덕구가 체포된 곳도 이곳이다. 지금은 잡목이 무성해졌지만 66년 전만 해도 억새만 무성한 들판이었다. 좌우측으로 하천 계곡이 휘둘러져 있어 천연 요새로 흠이 없었다.

인솔자인 홍순영 전 공무원노조 제주본부장은 “이 곳은 지금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였지만 4.3항쟁 당시 이 곳은 들판이었지만 불을 피워도 해안에서 보이지 않은 곳이어서 토벌대를 피해 주민 1천여명이 이 곳에서 생활했다”고 설명했다. 

▲ 이덕구 산전에서 이충재 위원장을 비롯 기행단은 4.3정신 계승을 결의했다.

원래 이 곳은 ‘북받친 밭’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북받친 밭을 중심으로 밤남도왓내 하류쪽엔 1948년 말부터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숨어든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던 곳이다.

이곳 일대의 피난민들은 당시 토벌대의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피해 제주읍 봉개리.용강리.회천리.도련리 등에서 올라온 제주 동부지역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무장대의 주력부대인 이덕구 부대도 1948년 말부터 1949년 3월경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후 사람들에 의해 ‘이덕구 산전'으로 불렸다.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 산전 곳곳에는 지금도 돌로 쌓아 놓았던 비트(초소)가 남아있어 당시 토벌대의 총을 피해 피해 산에 올랐던 피난민들과 결사 항전했던 무장대들의 비참했던 삶을 떠올리게 했다.

   
▲ 제를 지내는 이충재 위원장.

깨어진 항아리,녹슬고 깨어진 무쇠솥, 산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깨져 나갔을 것이다. 들킬까 두려워 몸을 가리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산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들과 마주하며 슬픈 역사의 대화를 묵묵히 나눴다. 66년전 평화롭게 살던 삶이 산산히 무서졌던 넋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를 지냈다. 소주한잔 과일 몇개로 넋들의 한이 위로 할 수 없지만 마음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2. 이덕구 산전에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내려왔다.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4.3항쟁으로 희생된 넋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4.3평화공원으로 향했다. 평화공원 주차장에서 하차한 공무원노조 이충재위원장과 기행단은 곧바로  13,461기의 위패가 모셔져있는 위령재단 앞에서 분향행사를 가졌다. 위령재단안을 둘러본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네별로 구분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넋들의 위패를 바라본 이들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릴 뿐이었다.

66년전 발생한 4.3 사건은 지난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제주도민들에게 침묵의 역사였다.

   
▲ 4.3평화공원 유패봉안소에서 기행단은 영녕들을 위해 분향했다.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가 4.3 항쟁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같은해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사과하면서 도민들은 비로소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희생된 고인들의 유가족들이 이 곳을 찾아 분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가슴속 깊이 숨겨놓은 슬픔을 터트렸다. 위패를 만지며 말 못하고 살아온 지난 삶을 슬퍼했다.

기행단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발굴된 유해 총 396구가 봉안된 봉안소를 거쳐 변병생모녀상(비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변병생모녀상은 1946년 1월 6일 ,제주 봉개동 지역에서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중  변병생(당시 25세)과 두살배기 그의 딸이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을 행인이 눈더미 속에서 발견했다. 이후 이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됐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기행단은 이 모녀상을 바라보며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입을 모았다.

   
▲ 변병생모녀상(비설)을 바라보는 기행단.

안혜란 성평등위원장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아이를 총탄에서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모습은 당시 토벌대들이 얼마나 잔인무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기행단은 이날 4.3 평화공원을 방문한 것을 끝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저 역사의 한 이야기로 여겼던 66년전 4.3항쟁은 이제 살아가며 지켜야 할 살아있는 정신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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