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무렵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했었다. 이 때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의 1787년 유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민주주의와 선거, 여론 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서양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다당제와 직접·보통·평등·비밀선거에 의한 국민의 선택을 철칙으로 한다. 그리고 여론을 존중하여 정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정치학자들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연상시키면서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선의 제도라고 단정한다. 과연 그럴까?

▲ 자크 루이 다비드(David, Jacques-Louis 1748∼1825) <소크라테스의 죽음 (The Death of Socrates)> 1787년 유화 작품 (129.5 x 196.2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소크라테스는 이 제도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고 사약을 받았지만, 그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억울한 죽음에 분개하면서 민주주의를 저주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다고 하지만, 사실은 소크라테스도 사형 선고에 찬성한 다수의 결정에 분개하고 저주했다.

소피스트들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은 ‘신을 믿지 않으며, 천상과 지하의 일을 탐구하고 약한 이론도 강한 것처럼 말함으로써 젊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있다’ 라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고소했으며, 아테네 시민들은 다수결의 투표로 사형을 결정했다. 이를테면 소피스트들이 조작해놓은 여론에 도전하고 자신들을 따르는 청년들의 생각을 바꿔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변명’했다.

“이것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은 아는 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모르는 것을 폭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명예심이 강하고 성급하며 수가 많았기 때문에, 떼를 지어 그럴듯하게 나를 비난하였으며, 오래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를 몹시 중상하며 여러분의 귀를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세력의 미움을 사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여러분은 내가 죽은 후에 곧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저주하였다.

정치학자와 정치인들이 칭송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민주주의의 진상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지금 우리들도 조작된 여론에 부화뇌동하며 그릇된 판단과 선택을 하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나름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국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정확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정보 제공 역할은 매스 미디어가 담당한다. 저널리즘, 소위 언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정보를 왜곡하고 허위정보를 제공한다면 국민들의 판단이 그릇되어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제도로 전락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여론을 존중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신봉한다. 여론이 표로 나타난 것이 다수결이다. 그러나 여론도 다수의 결정도 ‘참’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기득권집단에 의해 언론이 장악되어 있는 현실에서 비일비재한 현상이다. 여론이란 다수의 의견으로서 주관적 견해의 교집합에 불과한 것으로 그 교집합을 주무르는 것이 언론이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국민은 거수기에 불과한 것이다.

역대 거의 모든 선거에서 그랬고,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수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20~30대의 판단은 흐리멍텅하고, 50대 이상은 과거의 경험에 생각이 멈춘 상태에서 조작된 여론의 포로가 되어 늘 그릇된 선택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경향은 심화된다.

   
▲ 한겨레 6월4일자 조한혜정 칼럼.

조한혜정 교수는 6월 4일자 한겨레신문 칼럼 ‘선거에서 은퇴하는 할머니를 위하여’에서 올해 여든이 되신 친구의 할머니가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면서 위정자들에 대한 실망이 컸고 자신이 그런 지도자를 뽑은 것에 대한 자책 때문에 투표장 발걸음을 끊기로 하셨다”면서 “앞으로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교육감 선거의 결과에 고무될 필요는 없다. 보수 후보도 단일화되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었으면서도 염치도 없이 ‘도와주십시오’ 라는 판때기를 들고 앵벌이를 하는 정치인을 보고는 이성이 마비되고 감성이 발동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런 지도자를 뽑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나도 여든이 넘으면 투표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김동민 한양대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