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민주항쟁의 전개과정

박정희처럼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는 1987년 4월 13일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호헌’을 선포하면서 노골화되었습니다. 이에 민중의 저항 의지는 그에 비례해서 한층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두환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1987년 1월13일, 경찰은 서울대 고 박종철군을 고문, 끝내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평소 해왔던 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습니다. 경찰당국은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수십 군데에 이르는 피멍 자국과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고, 이 사건은 곧장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 및 기도회, 항의농성 등도 잇따랐습니다.

이에 전두환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계각층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다투어서 반독재 합류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고립되어 가던 전두환 정권에게 결정타가 터진 것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고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 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했던 것입니다. 민중은 분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고,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던 민중들은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하나로 단결했습니다.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같은 육사 11기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손을 잡고 치켜 올려 권력승계 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잠실 체육관은 분노한 민중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같은 시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는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려 역사적인 6월항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날 서울에서만도 30여 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초조해진 경찰은 해가 지자 더욱 포악해져 무차별 폭행을 가며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갔습니다. 밤 10시가 되자 8백 명으로 불어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맹렬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전국을 휩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중 최대 인파인 1백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투쟁의 파고는 높아지고 경찰력은 한계가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일각에서는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속히 고개를 들었지만 분노한 민중은 정권의 군투입 위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군이 투입되면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민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군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것은 부마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 시민이었는데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6월항쟁 상징적 사진 :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최루탄을 쏘지마라’며 앞에 나선 장면. 수소문 결과 찾지는 못함>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를 받은 뒤 새롭게 투쟁의 현장에 나선 상태로 87년 6월 항쟁은 1980년의 광주처럼 고립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시기 민중의 탄압하던 얼음기둥과 해방과 민주화를 위한 불기둥이 맞붙은 시대, 광주 민중항쟁은 마침내 수많은 불기둥을 만들어내 1987년 6월 항쟁으로 터져나온 것입니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서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이미 6월 20일부터 백악관에 한국대책 특별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의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6·29 선언이 민중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거듭되는 군투입 위협에 맞서 항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군투입 기도를 파탄시켜 내면서 끝내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굴복해야 했던 굴종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한 것에 대한 벅찬 환희였습니다.

6월항쟁은 기나긴 압제와의 투쟁에서 중요한 매듭 하나를 푼 것에 불과했습니다. 6월 9일 직격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고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 광장에는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고, 고 이한열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였습니다.

<백만명이 운집한 이한열 장례식: 서울시청광장>

6월 항쟁의 완성은 노동자 투쟁으로!

6월항쟁은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결코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6·29선언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다'라고 외치며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 그들은 노동자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며 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으면서도 해방이후 가장 천대받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습니다.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자신의 힘을 깨달은 것입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거리에서 타오른 6월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으로 옮겨 붙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인데 6월 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1987년 7월 5일, 최대 중공업 도시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현대엔진 노조의 결성은 즉각적으로 울산 전역을 노동자 투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치솟은 투쟁의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부산, 거제, 마산, 창원으로 번져 갔고, 이윽고 서울, 인천, 부천, 구로, 안양, 군포, 성남 등 수도권으로 옮겨 붙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업종별로도 제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운수업, 광업, 사무·판매·서비스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노동자대투쟁 기간동안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은 1,100여 개로 투쟁과정에서 조직된 자주․민주노조는 이후 민주노총을 건설합니다. 노동자대투쟁 기간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건씩 터져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며, 1980년 봄의 노동자투쟁(총 407건)보다 8배나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 억압 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았습니다. 6월항쟁 이후 터져나온 7·8·9 노동자대투쟁과 노동자 계급 선언은 우리역사를 발전시키고 밀고 갈 강력한 추진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6월 민주항쟁의 의미와 과제

우리 역사에서 6월 민주항쟁은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기폭제였으며, 6월항쟁 이후 시기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전진해온 시기였습니다. 이는 6월 민주항쟁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와 변혁의 원천이자 원동력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 이후의 상황을 평가할 때 민주주의 발전은 제한적이고, 수 많은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매 시기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자주적인 평화통일은 아직 준비되지 못했으며, 특히 2012년 반역사적인 박근혜 정부의 등장으로 유신독재로의 회귀 등을 말하는 것은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한계와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6월 항쟁에 대한 추억만으로는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역주의세력과 수구세력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6월항쟁이 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딛고 그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제2의 6월항쟁을 통해 87년 6월 항쟁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시켜야 할 과제가 분명합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가해 20여일 동안 전개한 반독재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다수 국민들은 스스로 6월항쟁에 참여하여 민중이 승리하는 역사적 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사회 구석구석의 잠재력이 동력화 되었고, 전 국민의 사회의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6월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새롭게 건설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에 시민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교육운동 등모든 분야에 운동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투쟁의 결과를 사회 모두가 나누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그 지속성과 견결성에서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남미와 아시아의 민주화투쟁이 특정 계기를 통해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면 우리는 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부터 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적어도 30년간의 군사독재 정권시대에 끊임없이 정권과의 투쟁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 역사에 수 많은 열사를 만들어냈고, 열사의 희생과 헌신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세계적인' 역사,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범적인 투쟁과 빛나는 역사는 바로 한국민주화투쟁의 역사입니다. 지난 2010년 광주민중항쟁 30년 각종 행사 가운데 세계 석학들이 모여 “광주민중항쟁을 고찰” 하는 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은 “한국의 광주민중항쟁이야말로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인류의 큰 자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경쟁과 개인주의, 자본과 국가의 결탁으로 탐욕과 이윤만을 위해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고 인류의 삶을 파괴하고 있지만 한국의 80년 광주에서는 공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해방 광주, 일주일간 그 어떤 금융기관이나 구멍가게 한 곳도 침탈당한 적 없이 광주시민은 모든 것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위대한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민주화투쟁은 '반동'이 몰아치던 60,70년대 세계사 속에서 세계민주진보진영의 큰 희망이자 빛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월 민주항쟁과 2014년!!

87년 6월 항쟁과 우리 현대사의 민주화운동을 통해 과거 군사독재정권과 그리고 현재의 보수정권이 국민을 국가의 부속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정치 행위에 대해 국민 스스로 권력이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근거와 자신감이 마련된 것입니다.

<2014 6/7 23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우리 역사는 대중의 투철한 변혁운동에도 불구하고 이 성과들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한계와 시행착오를 반복해왔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확인되듯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던 국민에게 진보정당은 희망으로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의 기본정신인 민주화, 민족자주, 평화통일의 과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로 우리 운동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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