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 실패를 눈앞에 둔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재벌 과보호’ 해소가 아닌 재벌이 주장하는 ‘정규직 과보호’를 앞세운 노동유연화 도입 의도다.

초이노믹스의 실패

박근혜 정부는 올해 하반기 들어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필두로 일명 ‘초이노믹스’로 불리는 양적완화와 재정확장을 통한 경기부양 정책을 밀어붙였다. 정부가 돈과 재벌 규제를 풀면 기업 활동이 늘면서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25일 “규제들은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서 처리하게 될 것”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쓴 것도 이 연장선 상이다.

   
▲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4일 ‘노동시장 구조개혁 토론회’에서 축사하고 있다. 이 장관이 밝힌 ‘업무성과가 낮은 근로자의 고용관계에 대한 기준과 절차’란 사실상 일반해고 요건 완화다. 자료사진

그러나 박근혜 정부 경기부양 정책은 집권 중반을 맞도록 신통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 전 정권을 거치며 악화될 대로 악화된 정부재정을 메우기 위해 기업으로부터 거두는 낮은 세금은 놔두고 서민 세금만 올렸다. 약방의 감초 같은 부동산 부양책에 실패해 전세 값은 폭등했고 거품은 그대로다. 덕분에 가계부채 전체 규모는 이미 1천조 원을 넘었으며 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수직상승중이다. 소득은 더디 늘거나 줄어드는데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17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 3분기 금융사를 뺀 10대 그룹 소속 상장사 사내유보금은 538조 원으로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271조 원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정부는 낙수효과나 아랫목 경제론을 들먹이며 재정확장과 기업우대 정책을 썼지만 대재벌 곳간만 채우는 부의 재편이 일어났을 뿐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지난 4일 토론회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수혜자는 정규직이 아닌 재벌과 소득상위 10%”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정권은 집권 초반에 단기처방으로 경제를 반짝 부양시켰다 몰려오는 부작용 속에 물러나곤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집권 중반이 되도록 경제가 살아나기는커녕 국가부채만 늘어나는 ‘일본식 장기 불황’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지경이 됐다.

경제구조 개혁 대신 노동시장 구조조정

이에 정부는 경제구조 개혁 대신 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타개책을 찾기 시작했다. 최경환 부총리는 지난 달 25일 ‘정규직 과보호’를 들먹이며 사회적 대타협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도 덩달아 지난 4일 ‘인력운용 유연성과 합리성’ 확보를 요구하며 ‘노동시장 제도에 대한 규칙 조정과 보완’을 제시했다. 기존 성과직무급과 유연 노동시간 도입 주장에 더해 고용 유연화를 언급한 것.

정부는 최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아래 노사정위) 산하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아래 구조개선특위)를 통해 노동시장 구조조정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노사정 공동선언을 확정키로 하는 등 최근 주장들을 노사정 합의 형식으로 확정지으려 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17일 정부가 저성과자 해고요건 기준과 절차 마련에 대한 합의문 초안 성격의 문건을 15일 구조개선특위 회의에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매일노동뉴스에 따르면 이 문건은 “근로계약 해지 및 근로조건 변경의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하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4일 ‘노동시장 구조개혁 토론회’에서 밝힌 ‘업무성과가 낮은 근로자의 고용관계에 대한 기준과 절차’란 사실상 일반해고 요건 완화다. 적대적 노사관을 가진 기업들이 노조 전임자 등 눈엣가시를 얼마든지 해고할 길도 열리게 된다.

▲ 이대로라면 정부가 정규직 고용, 임금, 노동시간을 개악하는 한편 비정규직을 확대·양산할 길도 열린다.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홍석범 연구원은 “개별적 노사관계로 파고드는 정부 시도에 맞서 ‘저지’가 아닌 노동법 재개정 등 공세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자료사진

앞서 16일 동아일보는 노사정이 노동시장 구조조정의 세 가지 원칙과 방향을 담은 합의문을 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해고요건 완화, 근로시간 단축, 임금체계 개편 등 구체적 내용에서는 쟁점이 크지만 1원칙인 ‘노동시장 구조개혁 필요성 공감’ 에 노사정위에 참가하는 노동계(한국노총)도 “논의 자체는 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정부가 해고 요건 완화, 직무성과급 도입, 노동시간 유연화 등 치명적 내용을 담은 1원칙과 모든 논의는 노사정위에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합의한다는 2, 3원칙을 경총, 한국노총과 어깨를 걸고 공동선언 하기를 강요하는 셈이다. 설사 한국노총이 탈퇴해 노사정 공동선언에 실패하더라도 정부 단독으로 이 같은 노동정책을 밀어붙일 기세다.

아울러 정부가 애초 내세운 노동시장 구조조정의 표면적 이유는 비정규직으로 인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결이지만 고용노동부가 준비하고 있는 ‘비정규직종합대책’은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파견 허용대상 확대, 직업소개소 규제 완화 등 개악투성이다. 더구나 이 같은 정책을 밀어붙이면서도 정부와 여당은 내년이 선거가 없는 해인만큼 여론악화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정규직 과보호론'에 맞선 '재벌 과보호론'을

문제는 정부가 법 개악까지 가지 않는 이상 민주노총과 노조가 이 같은 정부 방안에 대응해 96, 97년에 버금가는 노동법개악저지투쟁(노개투)을 조직한다 해도 정작 투쟁으로 막아낼 대상이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금속노조 법률원 김태욱 변호사는 “정부가 법을 손대지 않고서도 노사정 대타협 형식을 취해 이후 고용노동부 지침이나 고시를 내면 법원은 이를 참고해 불리한 판례를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정부입김이 강한 공공부문과 노조가 취약하거나 없는 중소기업을 우선 공략해 이른바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고립시킬 수도 있다. 나아가 정규직 고용, 임금, 노동시간을 개악하는 한편 비정규직을 확대·양산할 길도 열린다.

한국노총은 정부안 수용불가 입장을 내면서도 노사정위에 결합하고 있다. 이 상태라면 경제정책 실패 비난을 노동시장 구조조정으로 풀어내려는 정부 시도는 거침없이 진행될 수 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참가한 한국노총 또한 노조의 자부심을 지켜주길 당부한다”고 성명을 낸 이유다.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홍석범 연구원은 “개별적 노사관계로 파고드는 정부 시도에 맞서 ‘저지’가 아닌 노동법 재개정 등 공세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규직 과보호론’에 대한 ‘재벌 과보호론’ 제기와 친노동 입법투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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