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을 만큼 괴로운데 얼마나 더 열심히 살란 말인가...청춘의 고통 쓰리고 아프다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 <미생>이 원작의 인기를 이어받아 케이블방송으로는 이례적으로 8% 대의 시청률을 뽐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물여섯 살이나 먹는 동안 대체 뭐하며 살아왔는지 고뇌하며 정글 같은 기업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장그래가 사회초년생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들의 공감과 응원을 받고 있다.

1시간 가량 드라마를 몰입해서 본 뒤 TV를 끄고 잠자리에 드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 우리 청년들의 삶은 연민의 대상으로 공감을 얻고 있는 장그래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대기업 인턴(정규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으로 낙하산 내려줄 지인이 없다. 만취한 상태에서 “딱풀 좀 주라고” 동료에게 윽박지르며 장그래를 지켜주는 오과장도 없다. 자정도 아니고 저녁시간에 퇴근하는 장그래의 뒷모습이 너무 낯설다. 현실의 삶은 드라마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굴지의 경제단체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20대 청년이 정규직 전환의 희망이 사라지고 해고 통보를 받은 후 한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9월 26일의 일이다.

그는 초과근무, 휴일근무,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상의 불안, 사내 성추행…. 이 모든 것을 견뎌왔다. 웃는 낯으로 출근하기가 두려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그를 붙잡은 것은 곧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기업 간부의 약속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정규직이 될 텐데 왜 그만 두려 하느냐!” 이 약속, 아니 희망고문에 모든 것을 견뎌온 그는, 희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깊은 우울증에 신음하다 결국 자신의 삶을 내려놓았다. 먼저 떠나게 되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한 달 뒤, 또 다른 청년이 자신의 승용차에서 번개탄을 피웠다. 그는 대기업 통신사에서 악성민원을 전담하는 직원이었다. 회사는 악성 고객을 상대하는 그에게 자사의 IPTV를 판매하라고 강요했다. 판매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었고, 급여도 정상적으로 지급되지 않았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노동청에 신고해 달라”는 편지를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

이 죽음을 바라보며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스스로에게 되뇐다. “남 일 같지 않다.” 수십·수백 장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하고 복잡한 채용전형의 경쟁을 이겨낸 이들에게 허락되는 일자리는 비정규직·계약직·인턴이라는 이름으로 진열돼 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지만 계약 만료가 하루하루 다가온다. 안정된 삶을 향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 아우성의 다른 한켠에서는 면접장에 들어설 기회라도 얻기 위해 종로의 영어학원을 배회하며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청년들의 슬픔이 대기번호를 뽑고 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는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린다는 우리 사회의 상식과 정의는 무너진지 오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삶, 어쩌면 정규직이라 불리는 절박한 삶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깊은 절망만을 안긴다.

고용노동부는 장관과 청년들의 토크콘서트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일자리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듣고 싶다며 참여 상품으로 에너지드링크를 내걸었다.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며 잠을 줄여야 하는 고통을 아는가. 이는 각성제 기운을 빌려 당장 잠을 줄여서라도 취업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조롱이다.

정부가 내놓고 있는 ‘비정규직 고용대책’은 한술 더 뜬다. 현재 최장 2년으로 규정돼 있는 계약직 고용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계약직 사용사유가 법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오늘날의 ‘편리한’(!) 환경에서 기업들은 앞으로도 기존의 고용을 끊임없이 계약직으로 대체해 나갈 것이다.

또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계속적인 선별과 재선별의 과정, ‘취업 이후의 취업활동’을 청년들에게 강제할 것이다. 이 무자비한 노동시장을 내버려둔 채 계약직 고용기간을 1년 더 늘린다는 것은, 청년들에게 자행되는 희망고문의 기간을 1년 더 늘린다는 말과 같다.

일하는 이들의 땀과 노력을 유린하는 기업집단과 제 기능을 수행하기는커녕 더 깊은 절망을 조장하는 정부, 그리고 이 경계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삶.

이 사회에 발 딛고 선다는 것, “남 탓 할 필요 없이, 네가 더 열심히 살면 되잖아”라는 말로 외면당하는 청춘의 고통이 너무 쓰리고 아프다. 이미 죽을 만큼 괴로운데, 얼마나 더 열심히 살라는 말인가. 위기의 청춘이 보내는 불안한 신호에 이제는 우리 사회가 반응해야 한다.

“당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만 견뎌도 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시작하자. 이는 잔혹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희망의 메시지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