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위령제·우토르마을 등 광복70주년 끝나지 않은 상처와 아픔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과거사 왜곡 중단을 촉구하고 일본 군국주의 재무장을 규탄하는 한편 일제 식민지 시대때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 징용돼 노동착취와 인권유린과 차별 속에 살았던 현장을 방문했다.

양대노총은 8월 23~25일 2박 3일 간 일본 교토 북부 단바지역에 위치한 '단바 망간 기념관'과 '우키시마호 위령제', '우토르 마을' 등을 찾아 끝나지 않은 상처와 아픔을 함께했다.

▲ 단바 망간 기념관 갱도 내부. ⓒ 변백선 기자

▲ 갱도 안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입구가 있다. ⓒ 변백선 기자

첫날 '단바 망간 기념관'과 '마이즈루 전망대'를 찾았다. 일찌감치 떠난 버스는 울창한 삼나무 숲을 지나 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재일동포 2세 이용식 관장이 자상한 미소로 맞아 자료관으로 안내했다. 이용식 관장은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고 '단바 망간 기념관'에 대해 설명했다.

'단바 망간 기념관'은 1989년 5월 16세 나이에 강제로 끌려와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한 재일동포 1세 고 이정호 씨와 가족들에 의해 설립됐다. 피해자였던 고 이정호 씨는 15년 간 진폐증으로 고통 받으며 재일동포 노동자들의 피눈물 나는 역사를 남기기 위해 사비로 이 기념관을 건립했다.

일본 전역 5천여 개 기념관 중 일제 강제징용 관련 유일한 기념관이며 강제징용 노동자가 직접 만든 기념관으로 역사를 보존하는 큰 의미가 있다. 일본에는 위안부, 강제징용 등 관련한 박물관이 전무하다.

교토 북부에 위치한 단바 지역에는 망간 광산이 약 300개나 되는 일본 제1의 망간 광산지였다. 망간은 물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주로 대포 포신과 총 등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일본은 2차 대전 당시 강제 연행해 온 재일동포들을 이 망간 광산에서 일하게 했다. 단바 지역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는 갱도 안에서 500m까지 내려가는 좁은 굴에서 가혹한 채굴노동을 강요당했고, 그 결과 진폐증으로 죽어갔다.

▲ 함바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 이용식 관장. ⓒ 변백선 기자

▲ ⓒ 변백선 기자

▲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 변백선 기자

현재 고 이정호 씨의 아들 이용식 씨가 운영을 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진폐증을 앓으면 조선노동자로 규정돼 차별받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며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일동포들은 차별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용식 관장은 "20년 간 운영하면서 일본정부로부터 단 1엔도 받은 적 없고, 재정문제로 폐관됐다가 한국에 알려지면서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1년 평균 500만엔의 적자(5천만원) 상태"라고 말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 등 답사단은 이용식 관장의 상세한 망간기념관 역사를 들은 뒤 자리를 옮겨 재일동포들이 먹고 휴식을 취했던 함바(노동자 숙소)로 향했다. 함바 내부는 이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20여 명이 먹고 자고 했을까라고 싶을 만큼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다. 1평이 채 되지 않는 다다미 1장에 8명을 재웠다고 한다. 식사는 모두가 빽빽이 서서 먹도록 아예 의자도 없었다.

탄광 갱도로 향했다. 갱도 내부는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그 시절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안전을 고려해 300m 정도만 둘러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갱도 안에는 사방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당시 일하던 노동자들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들이 촉수 낮은 조명을 받으며 망간 캐는 모습이 보였다.

나라를 잃고 강제로 끌려와 비좁고 깜깜한 갱도에서 맨 손으로 망간을 캐내며 고통에 신음했을 재일동포 노동자...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마이즈루 만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로 향하는데 길이 2차선이긴 하지만 매우 좁아서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협소했다. 일본 땅이 산간지형으로 돼 있어 사람 살 공간이 많지 않아 집을 지을 때도 폭은 좁게, 2층형 구조로 짇고 도로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 해방 이후 강제징용 된 노동자들이 귀국하기 위해 탄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원인 모르는 폭발사고로 침몰한 마이즈루 만을 바라봤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한쪽에는 자위대 군함도 보였다. 마이즈루 만은 Y로 형성된 지역으로 현재 자위대 해군기지가 위치할 만큼 항구로서 최적지라고 한다. 다음 날 우키시마호 위령제가 치러질 장소를 멀리서 확인하고 숙소로 향했다.

▲ 중간 조금한 섬 두개 가운데에서 우키시마 호가 원인 모를 폭발과 함께 침몰한 곳. ⓒ 변백선 기자

▲ 우키시마 호 위령비. ⓒ 변백선 기자

둘째 날 양대노총이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이 숙소에서 나섰다. 배 폭발 후 재일동포 한국인 노동자들을 구명한 주변 지역 일본인들이 중심이 돼 위령비를 세우고, 사고의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매년 8월 24일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다. 교토 도지사 등 일본지자체 정부 및 재일동포단체들이 참가한다.

우키시마호 폭발과 재일동포 노동자 학살은 마이주르만 내 두 개의 섬 사이에서 발생했다.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지 일주일 후인 1945년 8월 22일 오전 10시, 우키시마마루 호는 조선인 7,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 항을 나서 부산 항으로 출발했으나 24일 음료수를 보충해야 한다며 돌연 방향을 틀어 교토 부 마이즈루 항으로 기항하던 중에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미국이 깔아놓은 기뢰에 의해 침몰한 우발적인 사고라고 일본 정부는 발표했지만, 출항할 때 부산항까지 편도분의 기름만 싣고 간 사실, 배가 마이즈루만에 들어섰을 때 만 입구에 ‘수뢰 없음. 안전’이라는 푯말이 떠 있었다는 사실, 배가 폭발하기 20분 전 일본 승무원들이 보트를 바다에 내던지고 먼저 탈출한 사실, 배 바닥에 350t 가량의 돌덩이들이 있었다는 사실 등으로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70년 전 해방을 맞고 꿈에 그리던 조국을 향한 배에 몸을 실었지만 우키시마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폭발했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 일본정부는 아직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 억울하게 죽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위해 술 대신 차를 사고 해역에 뿌리고 있다. ⓒ 변백선 기자

▲ 강제로 끌려와 억울하게 죽은 재일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추모하는 일본인들. ⓒ 변백선 기자

위령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기념회 회장의 추모사를 시작으로 교토부 도지사와 재일동포 추모사에 이어 술 대신 차를 격식 있게 올리는 제사를 치르고 재일동포 학생들이 '해당화가 필 때'라는 추모곡으로 마무리를 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경우가 없었던 터라 일본의 많은 언론들이 인터뷰와 사진촬영 등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끝으로 일본인들과 재일동포 등 위령제 참가자들이 사고 해역이 보이는 바다에 정성껏 우려낸 차를 붓고 꽃을 던지며 억울하게 죽은 재일동포 한국인 노동자들을 추모했다.

광복 70년을 맞아 '70년만의 귀향'이 시작된다. 추석을 앞둔 9월 12일 강제징용 된 재일동포 한국인 희생자 115구의 유골이 홋카이도 북부 마을에서 바다를 건너고 일본열도를 횡단헤 시모노세키항에서 대한해협을 지나 9월 18일 부산항에 도착한다. 이튿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서울시립추모공원에 안치할 할 계획이다.

▲ 우토로 마을 입구에 위치한 벽화. ⓒ 변백선 기자

▲ 우토로 마을. ⓒ 변백선 기자

마지막으로 '우토로 마을'로 향했다. '우토로 마을'은 해방 후 집에 돌아갈 능력이 없는 일부 한국인들이 잔류하면서 형성됐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차별로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우물물로 식수를 해결하고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다. 현재 우토로에 사는 재일동포들은 65세대 170여 명이며, 일본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있다.

우토로 마을에는 1,300여명이 강제동원돼 100만평 규모의 군사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언덕이었던 이곳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언덕을 평지로 바꾸는 노역에 동원됐고, 이로써 지대가 낮아져 장마철이면 지대가 낮아 매년 침수된다. 일본인도 노동에 동원됐으나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훨씬 더 힘들고 잔혹한 노동을 강요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비행장이 폐쇄돼 우토로 마을의 재일동포 노동자는 실업자가 됐고, 그 자리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재일동포 노동자를 내쫓았다.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거주지역을 사수하며 마을회관을 건립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작했다.

우토로는 교토부의 토지였으나 일본이 패전하면서 닛산차체주식회사(닛산자동차 계열회사)로 계승됐다. 그러나 토지 관리는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됐고, 재일동포는 집단합숙소인 함바를 수리하거나 개축해 주거로 사용했다.

▲ 건너편 벽이 보이는 만큼 재일동포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군사 비행장 건설하기 위해 언덕을 깎는 노역에 동원됐다. ⓒ 변백선 기자

▲ 표지판 뒤로 보이는 곳이 군사 비행장, 현재는 자위대군부대. ⓒ 변백선 기자

이후 부동산 회사에서 일본식산(니시니혼쇼쿠산)에 전매되자 서일본식산에서는 주민 전원에게 퇴거할 것을 명령하고 교토지방지판소에 '건물수거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했다. 우토로 지구를 재일동포 거주지역으로 개척한 사실을 근거로 시효 취득을 인정할 것을 호소했지만 1998년 원고승소판정에 이어 2000년 대법원에서 완전 패소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불법주거자가 됐다.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 전역에서 인권침해, 과거사 청산 등 우토로 문제를 알리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한국 및 유엔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주민들을 돕기위해 NGO단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시민들의 모금활동 및 우토로 알리기 운동을 통한 지원이 시작됐다.

한국정부도 이를 외면할 수 없어 2007년 말 국회에서 30억을 지원키로 결정했다. 2013년 우열곡절 끝에 지급됐지만 그 사이 환율 변동 등으로 6,400평 중 1/2을 구매하려던 계획이 1/3로 줄어들어 현재 한국정부 지원액으로 2천평을, 시민 등 모금액으로 800평을 추가 구입한 상태이며, 2016년 가을부터 주거시설을 건립할 예정이다.

우토로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재일동포는 "우리도 다른 지역에 이주해서 살 수 있었지만 극심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켜왔다"며 "우토로가 없어지는 것이 두렵고, 우토로가 없어지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고, 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역사와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역사인식 하에 우토로 마을을 지키는 투쟁을 해 왔다"고 말했다.

우토로 마을 입간판에는 '에루화'라고 적혀 있다. 그동안 온갖 차별과 억압, 설움 속에 '아이고 아이고' 하며 살아왔지만 우토로 마을에 지원의 손길이 이어지면서 평화와 희망의 의미를 담아 '지화자', '얼씨구 좋다'와 같은 뜻의 '에루화'로 바꿨다고 한다. 

▲ ⓒ 변백선 기자

▲ 우토로 마을에 살고 있는 강경남(78) 할머니. 재일동포 1세. 고향은 경상남도 사천군. 70년 전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다. ⓒ 변백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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