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선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실장 편지

배태선 민주노총 전 조직쟁의실장(오른쪽에서 첫번째)
 
"수용자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기상시간이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정리정돈 하시고 기상점검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6시 20분, 서울구치소의 하루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아침마다 방송 소리를 듣고 눈을 뜨는 박근혜는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내가 어쩌다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고통스런 현실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악몽보다 더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현실은 꼬집는 만큼 아프다.

내가 박근혜의 현재를 훤히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얼마 전까지 서울구치소 여사 독방에서 1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춘천교도소로 이감 와 서울구치소에서 박근혜를 만나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아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해고를 반대한다", "교과서 국정화 중단하라", "박근혜는 물러나라"고 외치다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 구속 수감됐다. 지난해 늦가을부터 매일매일 박근혜의 구속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는 구속되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나는 오랫동안 쌓인 분노를 쓸어안은 채 잠들지 못했다.

 

우리는 정말 '승리'했는가
 구체제의 몰락이라고 한다. 촛불혁명의 승리라고도 한다. 정경유착과 뇌물수수,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세력을 구속함으로써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치료했다고 한다. 법치주의의 실현이라고도 평가한다. 정말 그런가?

 

수구부패 세력의 아이콘 박근혜는 수의를 입고 철장에 갇혀 법의 심판대에 섰다. 그러나 검찰이 청구한 영장 목록 13가지에 '노동개악'이란 중요 범죄혐의는 없었다. 국민의 절반인 2천만 노동자를 상대로 박근혜가 임기 내내 벌인 파괴와 폭력의 전쟁이 노동개악인데 말이다.
박근혜는 '소득 4만 불', '해고요건 강화', '비정규직 차별해소와 정규직 전환 확대'를 약속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되자마자 박근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을 위한 최소장치를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 뿌리 뽑아야할 '규제'라 낙인찍었다. 대신 노동자들의 유일한 보호막인 노동조합을 자근자근 짓밟고 낮은 임금과 쉬운 해고, 비정규직 100%의 사회를 위한 가속 페달을 내리 밟으며 대국민 사기극을 펼쳐왔다.

 

박근혜는 평생을 땀 흘려 일해 온 성실한 중년 노동자들을 지목해 '자식 앞길 막는 파렴치한 기득권'이라 으름장을 놓으며 임금삭감을 강요했다. 또한 평균근속 6년이 안 되는, 내일 잘릴지 모레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 갖은 수모를 견디며 살얼음판 위에서 사는 노동자들을 무한경쟁의 저울에 내달았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저성과자로 추려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노동은 처절히 짓밟혔고 모욕당했다.

 

박근혜는 차별과 불평등, 양극화의 핵심인 비정규직 제도 개선을 역이용했다. 계약직 계약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기간제/파견직 일자리를 대폭 늘려 계약직이 끝나면 정규직이 아니라 다시 불안정 일자리로 편입될 가능성을 높였다. 비정규 일자리를 평생 전전하도록 비정규직법을 개악하면서 '개혁'이라 선동했다.

 

박근혜는 '노동개악'이 청년과 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그 결과 재벌과 박근혜 일당의 곳간은 차고 넘친 반면, 노동자, 서민의 주머니는 줄어들었다. 박근혜가 추진한 노동개악은 그 자체로 직권남용이며, 강요와 협박, 약탈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불의한 권력의 나쁜정책은 단죄되어야 한다.

 

박근혜'만' 사라졌을 뿐이다
박근혜는 구속됐으나 그에 저항했던 노동자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다. 박근혜는 파면됐으나 그가 곳곳에 뿌려놓은 영혼없는 고위직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적폐를 쌓고 있다. 공영방송은 여전히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며, 철도민영화는 이 순간에도 진행중이다.
게다가 "노조 동의 없는 성과연봉제 도입은 위법하다"는 법원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의 시종들은 정당하게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며 징계했다. 박근혜는 구속됐으나 박근혜의 나쁜 정책은 폐기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발한다. 이 땅을 재벌천국, 노동지옥으로 영구히 재편하고자 했던 박근혜의 추악한 노동개악의 실상을!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는 밥 한 끼, 옷가지 하나 온전히 걸칠 수 없는 자들이 노동을 천대하고 모욕하고 권리를 강탈해온 역사를! 박근혜가 파면되고 구속됐음에도 여전히 노동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는 것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완고한 질서를!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박근혜 체제의 몰락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싸웠고, 누구보다 끈질기게 싸운 노동의 굳건함을 믿는다. 검찰과 법원이 단죄하지 않아도 박근혜가 저지른 노동개악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막아내고 폐기시킬 것이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가짜다. 이것이 촛불의 시대정신이다.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일사의 바쁜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귀하고 소중하다. 우리는 이렇게 꾸준히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
춘천교도소를 적시던 봄비가 그쳤다. 이제 꽃이 만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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