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명아 열사 20주기 추도식
1998년 2월 24일, 서른 다섯 살의 젊은 노동운동가였던 고 최명아 민주노총 조직1부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났다. 열사의 20주기를 맞아 기일 전날에는 열사를 기리는 장학금 수여식이, 기일에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미사와 묘소 참배가 있었다.
열사를 기리는 추모의 글, 친구와 동지들의 증언, 노동자역사 한내에 기록된 고인의 연대기에 바탕해 열사의 삶을 소개한다.
최명아 열사는 196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1981년 이화여자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1983년에는 이대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열사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인천의 태성전자, 인우전기, 한비실업에서 일하면서 현장 경험을 쌓아 1987년에는 한양목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주도하다 해고‧구속됐다. 1988년 출소 후 인천지역 목재노동자회를 결성하고, 글로리아가구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교육부장을 맡았다.
조합원들의 신뢰 속에서 활동을 하던 것도 잠시, 글로리아가구에서 노조가 결성된 지 두 달만에 공장이 불에 탔다. 더 이상의 조업이 불가능했다. 이 틈을 타 회사는 최명아 열사를 비롯한 대학생 출신 활동가를 해고했다. 그 후 열사는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에 참여하여 복직투쟁을 했다. 1990년부터는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교육선전부장,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이 창립되면서 열사는 민주노총 조직국 조직1부장으로 활동한다. 19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민주노총은 출범 1년 만에 총파업을 선언하고 산하 전 단위노조는 즉각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열사는 각종 집회와 농성을 준비했으며, 지도부와 함께 산하 노조들을 찾아 총파업 투쟁을 조직했다.
1997년 구제금융 신청 상황을 빌미로 각 사업장에서 부당노동행위가 벌어지자 열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98년 2월 4일, 열사는 부당노동행위 중지를 요구하며 해고자 등 조합원 20여명과 함께 국민회의 당사에 농성을 들어갔다. 몸싸움을 하면서 당사로 들어가던 순간 열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1차 뇌출혈이 있었던 것이다.
증세의 심각함을 미처 알 수 없을 정도로 숨가쁜 일정이 흘러갔다. 이틀 뒤인 1998년 2월 6일, 1기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법을 골자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민주노총은 이를 안건으로 하는 대의원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후유증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열사는 대의원대회를 조직했다. 그렇게 열린 대의원대회, 노사정 합의안은 부결됐고 집행부는 총사퇴했다. 비대위가 꾸려졌고 비대위원들은 총파업을 결의했다. 열사는 쉴 틈 없이 산하조직의 총파업 준비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던 11일 오후, 최명아 열사는 증세가 악화되어 안과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다.
“이제 한 여성이 14년간 꿋꿋이 지켜온 노동운동가의 삶을 마치려 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최명아(36) 조직1부장이다. 부디 회복돼 민주노총이 부활하는 모습을 봐주면 좋으련만…. 최씨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민주노총 동료들의 간절한 마음이다.” 열사가 사경을 헤메이고 있다는 소식을 당시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1998년 2월 24일, 쓰러진 지 13일 만에 열사는 가족과 동지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짧은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