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터뷰/선전여지도] 철도노조 미디어소통실 백남희 국장을 만나다

현수막에 붓으로 적은 한 문장이 가슴을 친 적이 있었다. 영상과 포토샵이 첨단이던 시기도 있었다. SNS가 노동조합의 주요 선전수단이 된 것도 불과 수년 전 일이다. 

우리도 급하게 따라가야 할까. 효과를 두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사측은 노조 소식지의 애독자다. 손수 써 붙인 대자보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다. 직원식당 게시판에 붙인 포스터가 SNS에 올린 웹자보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우리 투쟁 소식을 알릴까?’, ‘소식지 만들어도 폐지만 남는 건 아닌가’ ‘페이스북에 올리면 사람들이 볼까?’, 너무나 다양해진 매체 환경 속 선전홛동가들의 고민이다.

이 고민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경험은 있다. 각자의 활동 영역에서 쌓아 온 경험을 나눠 보면 어떨까. <노동과세계>는 한 달에 한 번, 여러 영역에서 분투하는 선전 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과 진심어린 고민을 듣는 기획 인터뷰 ‘선전여지도’를 시작한다.

‘선전여지도’가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철도노조 미디어소통실 백남희 선전국장이다. 백남희는 동료의 죽음을 알리고자 삐라를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철도노조 선전활동을 놓은 적이 없다. 선전실을 혼자 지켜야할 때도, 정권의 탄압에 노조가 휘청거릴 때도 소식지를 매주 만들어냈다. 그 세월만 10년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바뀌어도 선전은 곧 글쓰기이며, 노동조합의 선전은 현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꿋꿋한 고집이 있다. 3월 2일, 용산 철도노조 사무실에서 15년만의 복직을 앞둔 그를 만났다.

 (인터뷰 정나위, 정리 안우혁)

 

<철도노조 백남희 선전국장 약력>
1996년 8월 철도청 입사
2001년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 교육선전국장
2003년 철도노조 선전홍보국장
2003년 6월 파업으로 해고
2006년 3월 파업 당시 철도노조 언론 담당
2009년 철도노조 선전국장 등
2018년 현재까지 철도노조 선전 담당

 

 

<노동과세계>가 선전활동가들의 결험과 고민을 듣는 기획 인터뷰 '선전여지도'를 시작하면서 첫번째로 백남희 철도노조 미디어소통실 선전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노동과세계 변백선
어떻게 철도노조에서 선전을 담당하게 되었나
1996년에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열차 타면 표 검사하지 않나. 지금은 열차 쪽에도 비정규직 승무원이 있지만, 그때는 모두 정규직이었다. 입사 2년 후 서울지방본부 교육선전국장으로 노동조합 선전 업무를 시작했다. 그 이후 2000년에 서울지방본부 선전홍보국장을 맡고, 2002년 민영화 저지 철도발전가스 총파업 이후 선전홍보국장을 맡으면서 선전 업무를 쭉 했다.

 

노동조합 활동에 다른 영역도 많지 않나. 선전이었던 이유는
2000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열차에 있을 때다. 추석 때 한 동료 승무원이 일하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너무 현장이 조용한 거다. 아무리 철도가 원래 그런 분위기, 사람이 죽어도 한 시간 만에 상황을 정리하고 기차를 움직여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식지를 만들어 돌렸다. 

 

어떤 내용인가
철도 승무원의 비인간적인 삶을 적은 내용이다. 혼자 글을 써서 도트 프린터에 A4용지 100장을 인쇄했다. 새벽 시간이면 승무원 대기실이 빌 때가 있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서 몰래 돌렸다.

 

반응이 있었나
상당했다. 당시는 민주노조를 꿈꾸는 세력과 어용노조가 대립하던 상황이었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내가 ‘승무원연대’라는 이름으로 선전물을 뿌리니 어용노조는 민주노조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너네가 했냐”고 묻고, 민주노조 하려던 분들은 “우리도 안 했는데, 누가 한 거야?”라며 놀라는 상황이 빚어졌다(웃음).


이후 철도노조 주간소식을 10년동안 만들어 왔다

그나마 익숙한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2003년 파업 때 구치소에서 두 달 정도 생활했다. 그때 철도노조에서 매일노동뉴스를 보내줬다. 우리 철도의 특성상 뉴스가 상당한데, 우리 소식을 이렇게 담아보면 어떨까 싶었다.

 

철도노조 주간소식은 어떤 형태로 구성됐나
A4 10장 정도로 구성했는데, 노조 소식과 더불어서 조합원이 알면 유익한 내용을 담으려 했다. 인사, 승진, 복직, 경조사부터 담았다. 투쟁 관련 소식은 뒤에 배치했다.

 

그렇게 구성했던 이유는
내 소식, 옆 사람 이야기가 실려야 조합원이 읽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조합원 전체를 의식하면서 만들고, 어떤 경우에는 한 명의 조합원을 떠올리며 만든다.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내용도 실었다. 언젠가 어버이날에는 1면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전화라도 해 보세요’라는 문구를 머릿기사로 실었다. 그 소식지가 나가고선 ‘고맙다’는 문자를 참 많이 받았다.

 

배포는 어떤 방식으로 했나
현장에서 출력해서 바로 게시판에 붙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활용한 지부가 많았다. ‘주간소식만이라도 노조 게시판에 붙여 놓으면 뭔가 하는 것 같았다’라고들 했다. 면피용으로 쓰인 셈인가(웃음). 배포는 주로 사내통신망으로도 배포했다. 비조합원은 물론 관리자까지 보냈다. 잘 읽었다는 반응부터 어떤 내용을 다뤄 달라는 주문도 들어온다. 그들도 중요한 선전 대상이다. 우호적 세력으로 조직해야 하지 않겠나.

 

기억에 남는 기사나 선전물이 있나
2002년 말,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전환하는 총투표를 했다. 그때의 성명서가 기억에 남는다. 또 2009년 허준영 사장 취임을 반대하며 ‘영어선생님에게 수학을 맡기는 학교는 없다’라는 대국민 선전물을 돌렸다. 경찰 출신인 사람이 어떤 전문성도 없이 철도 사장으로 오는 것을 그렇게 비유했던 것인데 반응이 좋았다. 유명한 블로그에 선전물 카피가 훌륭하다고 소개돼기도 했다. 뿌듯한 기억이다.

 

2009년 3월 경찰청장 출신 허준영 한국철도공사 사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포스터 '영어선생님에게 수학을 맡기는 학교는 없다' 허준영 사장을 비롯한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당시 기차 객석 등에 배포되어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기사, 선전물도 기억에 남지만 선전 활동을 함께 했던 김명환 선배, 조연호씨와 펴낸 ‘47 그들이 온다’라는 책도 기억에 남는다. 정부의 철도 구조조정에 맞서 총파업 투쟁을 하면서 저항하다 해고된 철도노동자 47명의 수기를 모은 책이다. 그때 부산에서 목포를 거쳐 서울로 해고자 동지들과 함께 순회 도보행진을 했다. 45일동안 걸으면서 매일 속보를 만들어서 올렸는데, 그것도 참 잊지 못할 선전이다. 또 그런 순간의 기록이 모여 우리의 역사가 되는 것 같다.

 

그런 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어버린다.
그렇다.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놓는 의미가 있다. 선전활동가 동지들이 그런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유인물과 기사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정리될 것이라는 어떤 사명감, 이런 걸 가지고 활동했으면 좋겠다.

 

쓰기 어려웠던 기사는
항상 쉽지만은 않다(웃음). 왜 어려울까.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서 나온 글을 보면 대개 읽는 사람보다 글이 먼저 열받아 있다. 글쓴이가 글에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록 읽는 사람은 오히려 차분해지고 글의 내용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사실관계를 담아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쓰기 어려웠던 글은 해고자 문제에 관한 기사였다. 나도 당사자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선전물도 기사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나는 안 하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내가 만들어야만 했다.
중요한 집회 현장이 있으면 현장 상황을 문자로 중계하는 일도 했다. 2011년, 철도 해고자 중 허광만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해고의 중압감이 그렇게 컸던 거다. 대전 본사 앞 집회 상황을 조합원들에게 문자로 중계하면서 계속 울었다.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행복했던 기사는 그래도 우리 해고자들의 복직 기사다. 다른 언론이 먼저 보도하기 이전에 조합이 먼저 알리는 게 도리라 봤다. 교섭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썼다.

 

15년만의 복직을 앞두고 있다.
복직 교섭장에 있었는데, 실감을 못 했다. 남의 일 같았다. 열댓 명 모여 복직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데, 사진 찍는 동지가 그러더라. 표정이 다들 이상하다고, 아무도 기쁜 표정이 아니라고, 슬픈 표정인지 기쁜 표정인지 알 수 없다고... 사진을 보니 정말 그랬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공허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말로도, 표정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 소식을 알리는 기사를 내가 직접 쓰는데, 그때부터 감동이 밀려오더라.
정확한 복직 날짜는 아직 못 받았다. 그동안 현장과 너무 떨어져 있었다. 복직하면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조합원들과 같이 공감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스스로를 정리할 시간도 가지고 싶다.

 

 
<노동과세계>가 선전활동가들의 결험과 고민을 듣는 기획 인터뷰 '선전여지도'를 시작하면서 첫번째로 백남희 철도노조 미디어소통실 선전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노동과세계 변백선

SRT 통합 기사는 후배에게 넘기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웃음)

 

파업 당시 대변인도 맡았다. 철도노조 선전은 곧 ‘민영화’라는 말과의 싸움이었을 텐데
처음 우리가 민영화 저지투쟁을 할 때는 주요 시민사회단체도 민영화를 찬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참 외로웠다. 우리는 영국 철도가 민영화를 거치며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 철도가 민영화된 뒤에 얼마나 사고가 많이 발생했는지, 요금은 얼마나 올랐는지를 알렸다.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줘서 돌리게끔 하고, 이웃집에 민영화 반대 스티커도 붙이고.

 

그 과정에서 ‘민영화’라는 말의 의미를 바꿔냈다.
가급적 우리의 요구를 직접 주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 나온 선전물을 보면 아시겠지만, 철도노조는 시민단체, 외부 인사의 입을 통해 우리 말을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제3자가 우리 편을 들어 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철도노조는 행운이다. 다른 사업장과는 다르게 철도 이슈는 곧 국민 이슈가 된다. 우리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다뤄주는 곳이 많다. 조합원들도 거기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는다.

 

민영화 저지 투쟁을 하면서 주로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가.
정책실과 선전실이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때가 있다. 선전 활동가들은 선전의 입장에서 내용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3년, 수서발 KTX, 논쟁이 있었다. ‘민영화라고 하는 게 맞냐. 분할 민영화라고 해야 하나. 민영화라는 말을 붙일 거냐. 말 거냐.’ 정책팀에선 논쟁이 있었지만, 선전은 ‘민영화’라고 해야 한다고 봤다. 다른 부서와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선전실은 국민 눈높이, 조합원 눈높이에 맞게 프레임을 구성해야 한다.


‘조직도 투쟁도 없을 때 선전이 먼저 치고나가야 한다’고 인터뷰했던 걸 봤다.

지금 선전은 단지 정책과 조직의 사업을 알리는 역할로 축소됐다는 생각이 든다. 선전의 시각에서 우리 노조의 입장과 정책을 어떻게 조합원과 시민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철도 파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현장에는 징계의 회오리가 분다. 간부는 물론 조합원들까지 탄압이 극심했다. 우리는 파업보다 파업 이후가 더 힘들었다.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조직은 움직이기가 어렵다. 이때 선전이 조직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2014년 3월에 발행된 철도노조 투쟁속보 "확산되는 총파업 요구, 분위기 심상치 않다" 철도노조 제공
 
구체적으로 어떤 걸 했나
주요 역사에 현수막을 게시했다. ‘우린 재파업으로 간다’라고. 주요 역에는 결의대회 포스터를 부착했다. 조합원들 보고 기죽지 말라고 현수막도 크게, 선전 문구도 강하게 썼다. 움직임이 살아 있는 특정 지부의 소식을 강조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재파업 들어가나?’ 할 정도로 말이다. 서울지방본부 교선국장을 할 때 혼자 일주일에 걸쳐서 이 일을 했다.

 

벌어지는 소식만 전하는 것을 넘어,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조직은 인적자원을 가동하는 것이다. 움직임이 무겁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사람을 모아내야 하기에 공간의 제약도 있다. 반면 선전은 가볍다. 시공간의 제약도 상대적으로 적다. 조직이 힘들어질 때면, 선전도 덩달아 우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가 오히려 선전의 시기다. 크고 당당하게 치고 나가야 한다. 상대에게 ‘우리 조직이 아직 살아있다. 반격도 가능하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파업이 길어지면 선전에서 새로운 쟁점을 만들고 이슈를 발굴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2016년 철도파업 도중 대체인력으로 군 병력이 투입되었는데, 그것의 법적 근거를 문제 삼아 이슈로 만들어냈던 적이 있다. 이전에는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던 것을 따져서 새로운 쟁점으로 만든 것이다.
2016년 10월 31일 철도노조0 파업 시기, 국방부는 군 대체인력 466명을 코레일에 파견했다. 국방부는 철도파업이 '재난'에 해당되므로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대체인력을 동원한다고 했으나 재난 관련 주무부처인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철도파업은 재난에 해당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해 국방부에 동원명령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안전처가 철도파업에 따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이에 관해 철도노조는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방부가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헌법이 보장한 파업권을 박탈하고 있다”며 “군인은 병영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철도노조 제공
민주노총 선전, 이렇게 하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나
‘들꽃 공단에 피다’라는 책이 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우리 철도도 농성을 많이 했지만, 아사히 동지들의 농성투쟁과 우리의 그것은 좀 다르다. 이런 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투쟁하면서 밥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동지들은 매 끼니 식사도 비용 부담이 되어 힘겨운 것이다. 민주노총에서 한 달에 한번 투쟁사업장을 취재해보면 어떨까. 취재해서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기사에 투쟁기금 계좌를 남겨 기사를 본 조합원들이 투쟁기금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과세계>가 선전활동가들의 결험과 고민을 듣는 기획 인터뷰 '선전여지도'를 시작하면서 첫번째로 백남희 철도노조 미디어소통실 선전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노동과세계 변백선
포털사이트 다음의 ‘스토리펀딩’ 같은 기획인가
80만 조합원이 있는데, 그 중 백 명이 천원씩만 보내도 10만원이다. 현장 조합원들은 민주노총을 멀게만 느끼는데, 투쟁기금 통장에 10만원이 찍힌다면 민주노총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 같다. 김명환 선배(철도노조 전 편집국장, 시인)와 이 책의 서평을 철도노조 웹진에 실어서 우리도 모금을 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에서 선전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인체로 표현하면 헤모글로빈 아닐까. 헤모글로빈은 각 세포에 산소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선전도 그렇다. 제때 산소를 전달 못하면 세포가 죽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 선전이 제때 알려야 할 걸 알리지 않으면 조합 내에서 소통이 안 된다. 그러면 움직여야 하는 조직이 움직일 수 없고, 중요한 상황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게 된다. 혈액 속 헤모글로빈이 일상적으로 움직이면서 산소를 실어나르는 것처럼, 선전 활동가도 그렇게 조합원들의 일상적인 소식통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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