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와 함께 하는 공모 당선작

1989년 07월 28일 서울 잠실여고
27일 철야농성한 학생 3백여 명이 교문에서 연좌농성. 징계위를 무산시킴.
 

 1989년 여름에 있었던 그 일이 기사화되었다면 인터넷에서 검색되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위의 내용들이 검색된다. 나뿐 아니라 모든 잠실여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몇 달을 앓았을 고민과 한탄과 눈물과 안타까움이 단 몇 줄로 정리되어 있다. 세상일들이 대개 그러하지 않은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사연들을 늘어놓자면 책 한 권으로 정리될 법한 일도 신문 지면에는 몇 줄 단신으로 끝나고 마는 법. 성실하고 예민하고 가슴이 뜨거운 누군가가 부지런하게 자료를 찾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조각난 기억과 사연들을 이어붙이지 않는 한, 그리고 그렇게 이어붙인 사연들이 한 편의 글이 되어 회자되지 않는 한, 그 일을 겪은 당사자들한테도 몇 줄 단신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단편적인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좌우하는 '생각의 좌표'가 될 수도 있다.


 1989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 해 그 날의 일에 대해 전후맥락은 고사하고 몇몇 장면만 희미하게 기억하는 내가 감히 이 글을 써도 되는지 망설여진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전교조 30주년 공모전 수기 중에, 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누군가가 벌써 글을 올렸을지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면, '나는 너보다 더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어'라며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

 당시에 우리들이 철야농성했던 장소는 위의 기사에서 '학교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나는 '야간 자율학습실'로 기억한다. 학교 지하에 있었던 야간자율학습실. 커다란 책상마다 의자들이 사면으로 여러 개 놓였던 야간자율학습실. 끊어진 필름을 연결하듯 그 날 밤을 생각해 보면, 밤을 꼬박 새우며 노래를 불렀던 일이 기억난다. 역사 선생님한테 배웠던 노래였는데,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이 노래를 여러 번 불렀고, '참교육' 단어를 이용해서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를 했다. 예를 들어 '미래 소년 코난' 노래를 교육과 관련지어 가사를 새로 써서 불렀는데(당시에 나랑 아주 친했던 친구가 해낸 일이다!), 노래 마지막 부분 '우리들의 코난'을 '우리들의 참교육'으로 목 놓아 불렀던 게 생각이 난다.


 고등학생 아이가 해직 위기에 놓인 전교조 선생님들을 위해 철야농성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이 흔쾌히 허락해줘서 300명 넘게 모였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놀랍기도 하다. 핸드폰 아니 삐삐조차 당연히 없던 시절, 서로 연락하기 위해서는 집에 달랑 한 대 있는 전화기에 의존했을 시절인데, 여름방학에 연락하고 모였다는 일이 기적 같다. 아마 야간자율학습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거 같다. 너도 허락받았어  이야 반갑다! 친한 친구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마주할 때마다 반갑고 든든했다.


 새벽에 학생회장이 '계속 농성을 주도하면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에 놀라서 달려온 아버지 손에 끌려 울면서 농성장을 나갔던 일은 지금도 가슴 아픈 한 장면이다. 다음 날 비가 뿌렸다. 우리 손에 우산이 쥐어져 있었던 게 생각난다. 운동장이었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행진하려고 할 때 학생주임 선생님들을 비롯해 많은 선생님들이 우리를 막았고, 그 와중에 어떤 애는 맞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몸싸움 비슷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이들도 통제하는 선생님들도 점점 감정이 격앙되고, 저 멀리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보며 아이들이 하나둘 울기 시작하고, 고성이 오가고 누구는 넘어지고, 어떤 애는 말리는 선생님을 우산으로 때리기도 하고… 그렇게 전교조 선생님들과 우리는 철저하게 격리되고,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하나둘씩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우리 학교는 내가 5회 졸업생이다. 신생학교나 다름없는 사립이어서 학교에 젊은 선생님들이 참 많았다. 해직됐던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고생들의 동경과 연모를 한 몸에 받던 30대 초중반의 남자선생님들이었다. 특히 역사, 윤리, 국어 시간에 우리에게 열정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선생님들을, 요즘 표현으로 하면, '팬심' 가득한 마음으로 우러러 봤다. 물론 그룹 '소방차' 등 연예인들에 대한 관심도 많았으나 학교에서 선생님들한테서 얻는 기운찬 에너지가 있었다.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들은 우리가 몰랐던 역사, 사회, 정의, 참교육, 민주주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우리는 그분들 덕에 대학 입시에 찌들기만 한 학생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 고민하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1989년 그 당시에는 학교 선생님들 덕에 고등학생들이 '매트릭스'에서 벗어난 참세상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수백명이 철야농성장에서 모였다. 정의롭고 아름다웠고 멋있었던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자고.


 결국 선생님들은 열 분 넘게 해직되었고,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열린 책방'이라는 서점을 연 해직선생님 덕에 졸업 이후에도 몇 번 찾아가 뵈었다. 내가 대학교 원서를 쓸 때 '국어교육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잠실여고 선생님들처럼 멋진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동아리에 학회에 가두투쟁에 임용고시에… 나를 정신없이 바쁘게 하는 많은 일들에 몰입하면서 선생님들에 대한 관심은 점점 옅어져 갔다. 그렇게 임용시험에 붙고 첫 발령을 받은 1994년도는, 전교조 해직 선생님들이 각서를 쓰고 학교로 돌아간 해이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해직된 선생님들이, 나와 발령동기가 된 것이다.


 94년도 나의 첫학교는 중학교였다. 얌전하고 어설픈 새내기 교사였던 나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 앞에서 당황했다. 학교 현장이 생각보다 건조하고 차가웠다. 각자 일하느라 바쁜 선생님들, 퇴근 시간 되면 순식간에 비는 교무실, 주입식 수업 같은 조용한 교무회의, 수업시간에 딴짓하고 무례하게 구는 학생들이라니! 89년도에 전교조를 결성했던 선생님들은 도대체 무슨 열정으로 그렇게 분연히 떨쳐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함께 손잡고 일을 도모할 동력은 무엇이었나. 내가 느낀 학교는 '각자도생'의 공간이었다. '개인 플레이'가 얼마든지 가능한 이곳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는 연대의 깃발이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 참 대단한 일이구나 싶었다.


 발령받자마자, 전교조를 위해 만 원씩 후원하겠냐고 묻는 선생님이 있어서, 흔쾌히 응했다. 당시에 나를 비롯해서 3명의 새내기 교사가 있었는데, 전교조 후원금을 내는 새내기는 나 혼자였다. 다른 두 명은, 전교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던 거 같다. 나는 대학교 시절부터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학회에서 활동했고, 여고시절에 전교조 선생님들을 존경했고 아프게 떠나보냈기 때문에 '전교조' 세 글자에 친숙함과 그리움을 느낄 지경인데, 다른 두 선생님에게는 '왠지 불편한 운동권 단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거 같다. 전교조에 대한 이야기는 조합원들끼리만 했지, 비조합원 선생님들과는 불편한 정치 얘기 안 하듯 서로 암묵적으로 피했다.


 첫 학교에 활동적인 전교조 선생님들이 전입을 오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던 게 기억이 난다. 친목모임이든 학교에 대한 불만 토로든, 전교조라는 이유만으로 더 친근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동료들이 생기게 되었다. 99년도 2학기에 고등학교로 발령받아 가니, 전교조 선생님들이 훨씬 더 많았고 모임도 활발했다. 이 해에 전교조가 합법화되었다. 2004년도에 발령받은 고등학교에서는 조합원이 전교사의 50% 이상이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전교조 선생님이 전근 간 그 자리에 전교조 아닌 선생님들이 전근을 오면서, 조합원 수는 나날이 줄었다. 조합원이 희귀한 존재였다가, 합법화 직후 흔하고 자연스러웠다가, 오랜 세월 지금까지 별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전교조 선생님들은 점점 늙어갔다.


 2000년에 큰애를 낳고, 2005년에 작은애를 낳은 나는 교사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주부', '엄마'로서의 정체성에 더 좌우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새내기 교사가 보면, 정말로 '건조하게 근무하다 퇴근하는'교사의 표본이 된 것이다. 조합원이면서 분회모임은 육아를 핑계로 거의 가지 않는, 그야말로 '후원회원'으로만 존재하는 조합원이었다. 가지가지의 이유로 조합원들이 매년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전교조는 점점 늙어갈 뿐 아니라 힘을 잃게 되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아예 '빨갱이'취급을 받으며 언론에서 조롱당하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리고 지금도 회복이 안 됐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마저 보수집단의 눈치를 보느라 아직도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썩 맞는 비유는 아니고 오히려 비약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독립운동 열심히 하던 투사가 칭송받고 자자손손 잘먹고 잘사는 예가 없듯이, 전교조가 학교 현장에서 이뤄놓은 많은 업적들은 '원래부터 그랬던 제도'가 되어 학교에 정착하는 대신 전교조라는 이름은 점점 학교현장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학교 현장이 좋아지고, '전교조가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대세가 된 듯하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는다. '배드민턴 동호인', '골프 동호인', '교원학습 공동체', '동문회' 등등 각종 친목모임이라면 모를까 굳이 묵직한 노동조합에는 가입하기 부담스러워 한다. 앞으로 전교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전교조에 대해 갖는 연민과 안타까움은, '전교조 키드' 혹은 '모태 전교조'라서 생긴 독특한 감수성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웬만해선 변하지 않고 내가 퇴직하는 날까지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굳건하게 자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교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혹은 꺼려하는 선생님들의 마음 또한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해직됐던 선생님들 대부분이 30대 초중반이었다. 나는 요즘 학교에서 30살 전후의 선생님들을 보면, 어린 대학생들 보는 것처럼 귀엽고 예쁘다. 그 시절 내가 우러러봤던 선생님들은 지금 내 나이에서 보면 '젊다 못해 어린 그들'이었다. 시절을 잘못 만난 죄로, 그 나이에 아이들을 지킬 참교육을, 나라를 지킬 민주주의를 고민하며 해직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떨쳐 일어났다. 안온한 삶을 버리고 사회변혁을 위해 이 한 몸 던진다는 점에서 그 옛날 독립투사의 마음가짐과 무엇이 달랐을까 싶다. 방식과 내용이 차이가 있을 뿐 그 본바탕은 같지 않을까. 내가 사범대에서 새내기 교사의 꿈을 펼치던 시절에는, 전교조 교사라면 마땅히 해직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는 교직에 나와서 철저하게 생활인이 돼버렸다.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죽는 것보다 힘든 결단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들었고, 변혁을 도모하는 그 모든 행동과 발언들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도 어느 순간의 미세한 틈에 의해 균열이 생기기 일쑤라는 것도. 그런 아픔과 희생들 덕에 이 사회가, 이 역사가 손톱만큼이라도 변하기는 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여간해서는 세상이 좋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나같은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망설이다 창씨개명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나의 추억과 감상 속에서 영웅으로 존재했던 그 선생님들은 이제 내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영웅보다는 내 삶의 성찰과 실존적 고민의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선생님들은 여전이 나를 철들게 하고 있으며 아직도 나를 가르치고 내가 사색하게끔 이끌어 주신다. 나에게는 그런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정작 나는 제자들한테 어떤 선생님일까 질문해 본다. 그 질문도 내가 퇴직하는 그 날까지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