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현장에서 밤낮을 잊은 공무원이 있을 줄 압니다. 경쟁을 넘어 아이들 저마다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며 혁신교육에 힘을 쏟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함께 협력하며 난관을 극복하고, 낡은 세계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목소리에도 귀 기울입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아직은 공동체의 면모를 간직하고 발전하고 있음에 안도합니다. 약자와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타인의 권리가 나도 지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보입니다. 근대 이후 역사는 노동자와 같은 약자들에게 노동권이라는 기본적 생존권을 부여해왔고, 선진국일수록 그것이 약탈적 자본에 맞서 인간을 지키는 보편적 정의임을 정치와 제도로서 인정해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현실도 존재합니다. 일부 교사이거나 학교의 공무원, 또는 그들처럼 되고 싶은 이들이 쏟아내는 미움과 조직적 혐오는 상처를 넘어 공동체의 연대를 끊어냅니다. 최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역차별, 현장 갈등 유발하는 교육공무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8명이 넘는 참여로 세력화되고 있습니다. 보수적이고 냉혹한 그 게시글의 맥락을 살려 다소 강한 표현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학교의 공무원과 교사들이다. 우리들의 보조에 불과한 교육공무직 주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뭘 더 요구하느냐! 노조 믿고 떼쓰지 마라. 뒷구멍으로 들어온 주제에 시대 잘 만나 무기계약직 됐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계약기간 끝나면 싹 자르고 시험 봐서 새로 뽑아야 하는데 분통터진다. 일도 못하는 주제에 일하지 않으려고 집단행동으로 대든다. 코로나 긴급돌봄도 교사들에게 다 떠넘겼다. 이런 주제들의 임금이 오르는 건 역차별이다! 급식실에서 일한다고 급식비 면제해주는 것도 역차별이다! 의무는 팽개치고 권리만 누리려는 공무직들에 대해 정부는 의무와 징계 제도를 만들어서 매로 다스려라!”

맞습니다. 자극적 표현으로 각색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분들의 진솔한 혐오라고 해도 틀리진 않을 것입니다. 학교의 다수를 구성하고 교육을 이끌어간다는 분들의 씁쓸한 혐오와 편견, 사실을 왜곡하는 침소봉대를 보자니 한 숨이 깊어집니다. 지성적 사유와 타인에 대한 앎이 이토록 부재한 것을 보면, 한국의 시험이란 역시 앙상한 암기활동에 지나지 않은가 봅니다. 저분들의 말처럼 교육공무직이 고분고분 납작 엎드리지 않아서 교육의 질이 저하된 걸까요? 아니면 서열평가와 경쟁,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 찬 교육현장과 교육관료들의 문제일까요? 

일단 허위사실부터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교육공무직이 공무원보다 임금이 더 많다고요? 사실이 아닙니다. 임금의 일부 항목만 비교해 호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간 임금 총액을 보면 공무원이 월등이 많습니다(표1 참조). 심지어 공공부문 공무직 가운데 교육공무직의 임금이 가장 낮습니다(표2 참조). 허위사실 유포를 촉발시킨 건 노동자 미워하기로 소문난 한국경제 기사였습니다([팩트체크] 1호봉 9급 교육공무원보다 학교 1년차 조리사가 월급 더 많아).

ⓒ 박성식
ⓒ 박성식
ⓒ 박성식
ⓒ 박성식

그렇고 그런 기사지만 그래도 끝에 일말의 양심은 써놓았더군요. “연총액으로 계산하면 둘 사이의 임금은 역전된다. 공무원이 받는 정기상여금과 명절휴가비가 교육공무직에 비해 두 배가량 많기 때문이다. 호봉 상승분이 더해지는 공무원과 달리 교육공무직은 근속 수당이 1년에 3만2500원에 불과해 장기근속 시 임금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여기에 또 비교에서 누락시킨 맞춤형복지비와 정근수당가산금까지 추가 비교하면 공무원과 격차는 더 벌어지고, 그나마 같았던 중식비는 2020년 공무원은 14만원으로 올랐지만 교육공무직은 13만원 그대로입니다. 치졸합니다. 정부가 밥값 1만원조차 차별하는데, 노조는 가만히 있으라고요? 여러분들의 보조들은 그래야 합니까.

‘보조’라는 서열 가르기도 개탄스럽습니다. 함께 학교를 꾸려가는 동등한 동료로 존중할 순 없는 것입니까. 함께 가정을 꾸려가는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보조입니까? 그렇게 꼭 “보조 주제에”라며 서열을 지어야 여러분들의 고충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것입니까. 타인의 땀의 가치를 쉽게 규정하지 않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보조’라는 규정부터가 현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교육공무직 중 다수인 급식노동자들은 교사/공무원들의 보조가 아닙니다. 홀로 급식실과 도서관을 책임지는 영양사와 사서는 당신들의 보조가 아닙니다. 너무도 필요해서 전염병이 돌아도 열어야 된다는 돌봄교실을 책임지는 돌봄전담사들도 당신들의 보조가 아닙니다. 오전에는 유치원교사 오후에는 유치원방과후전담사, 우리는 당신들의 보조가 아닙니다. 전문상담사, 교육복지사, 사회복지사, 미화, 시설, 당직, 운동부지도자, 특수교육지도사, 다문화언어강사... 등 학교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우리는 여러분들의 손가락 지시로 이리가고 저리 가는 보조가 아닙니다. 교무, 행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무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을 하거나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하도록 행정업무를 책임지는 동료들이지 ‘보조인 주제’가 아닙니다. 

왜 우리 서로는 교육권력에 맞서 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교사업무 경감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자는 요구에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제대로 행정업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교무실무사를 충원하라고 왜 뜻을 모으지 못하는 것입니까. 과학과 전산 실무사들이 채용 당시 정한 고유업무를 보장받겠다는 요구가 부당한가요? 값싸게 비정규직을 쓰고 이리저리 기준도 없이 잡무를 지시하는 교육청과 학교의 고용행태가 문제의 본질 아닐까요. 교사들도 고유업무인 수업에 전념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계와 서열을 정해 사람을 싸게 부리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인력을 늘리고 학교에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학교와 지역공동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싶습니다. 교육공무직 형성 초기 입직과정이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직업 형성 초기에 나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립이 특히 그렇지만 교사도 과거 공무원도 모두 공채 시험을 통해 선발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아무렇게나 값싸게 사람을 쓰면 그만이라고 식으로 운영한 교육청이지 교육공무직에게 없는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너무 저임금이라 일하려는 사람도 없던 시절이었고, 이제 10여년이 훌쩍 넘어 경력이 쌓이고, 학교의 기능도 다양해져서 우리도 교육주체라고 말하니 ‘보조인 주제’에 꼴값인가요? 1969년 독일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는 교수를 누르고 ‘보조 주제’인 조교가 총장에 당선됩니다. 그는 교육을 잘 이끌어 재선을 하고 8년 동안 총장직을 수행합니다. 그 기간 베를린 자유대학은 민주적 운영과 민주적 교육이 꽃을 피웠다고 한 사례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코로나 긴급돌봄은 교육공무직 돌봄전담사들이 “못하겠다고 떼써서 교사들이 떠맡고 있는 학교들이 상당히 많다”라는 주장은 누명입니다. 안전을 위해 긴급돌봄은 교실 당 최소 인원으로 운영하되, 많아도 10명 내외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육부의 방침입니다. 게다가 시간은 늘려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열고 있습니다. 4~6시간 단시간제 돌봄전담사 중심으로 운영해온 기존 돌봄 인원으로는 긴급돌봄을 다 책임질 수 없습니다. 긴급돌봄은 휴업 중인 학교 구성원이 함께 책임져야 하는 구조적 요인이 발생한 것이고, 당연히 그것이 교육부의 방침입니다. 돌봄전담사들은 기존에 맡던 책임에 더해 추가적인 돌봄을 하고 있으며, 부족한 부분은 교사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 방침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남의 탓으로 돌려선 안 됩니다. 마치 교사들이 다 떠맡고 있고, 이게 다 돌봄전담사들이 강성노조를 등에 없고 떼를 써서 그런 것인 양 덮어놓고 매도하니 가는 말도 곱지 못해 죄송합니다. 시간제 중심의 돌봄 체계와 정책이 위기시기 혼란과 갈등, 문제를 증폭시킨다고 제대로 표적을 잡고 제기하는 강성노조가 자랑스럽습니다. 문제의 구조적 원인이나 본질을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개 우리는 나의 불편을 옆에 있는 동료나 만만한 누구의 탓인 양, 잘못된 표적을 만들어 불만과 비난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만해야 합니다. 만납시다. 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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