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숨결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열사들이 그토록 바있던 내일입니다.
열사는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만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라들의 가슴과 실천속에 살아 숨쉬는 열사들을 기억합니다.

이현중.이해남 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이해남 열사 17주년인 11월 13일 풍산공원묘원에 모셔진 열사묘역앞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다. 

 이해남 열사 열일곱번째 추모제
 이해남 열사 열일곱번째 추모제

금속노조 세원테크 지회 지회장이었던 이해남 열사는 파업도중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이현중 동지의 장례식이 60여일이 지나도록 치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한진중공업 김주익 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이 땅의 노동탄압에 대한 분노, 그리고 노조파괴자 3인에 대한 분노 등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분신 2003년 11월 7일 산화해갔다.

세원테크 지회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자 노동조합을 힘들게 결성했으나 악질 기업주 김문기 회장은 수억원을 들여 용역깡패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길바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노조를 없애고자 수십억을 들여 노조파괴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구사대와 공권력을 동원해 이현중 열사를 죽음으로 내몰기에 이르렀다. 이후 세원테크 지회 노조는 이현중 동지의 장례식을 보장하라며 70여일 넘게 노숙농성을 벌였지만 오히려 사측은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공권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연행하고 간부 3명을 구속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지는 법에도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수십억원의 손배·가압류와 구속, 수배, 해고까지 당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에 대해 항거하기 위해 노동탄압이 없는 세상,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003년 11월 17일 분신 산화해 가셨다. 

[약력] 
1962년 충남 대전 출생
2001년 5월 세원테크 입사
2001년 10월 16일 세원테크지회 결성 및 지회장 당선
2001년 12월 12일 충남지역 연대 총파업 이끌어 냄
2002년 1월 20일 12.12 총파업 건으로 구속
2002년 3월 21일 보석으로 출소
2002년 7월 14일 7월 8일 세원테크 공장 점거 투쟁 건으로 수배
2002년 12월 9일 공장점거, 2002년 임단투 등으로 구속
2003년 3월 18일 해고
2003년 4월 11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선고받고 출소
2003년 9월 5일 고 이현중 열사 투쟁건과 관련해 업무방해
명예훼손, 집시법 위반으로 수배
2003년 10월 23일 오후 8시 50분 경 분신
2003년 11월 17일 운명

이해남 열사
이해남 열사

기관지 변혁정치 94호에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 님이 기고하신 <하늘 끝자락 별이 되어 빛날 때> 글을 옮겨봅니다.

이해남과 이현중, 두 번째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2002년 여름, 이현중과 세원테크의 노동자들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높은 철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진 회사 정문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을 매일 했고, 이해남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도피 생활을 했다.

그날, 철제 바리케이드를 두고 구사대와 싸우던 조합원들이 바리케이드 위에 쇠갈고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려고 했다. 사측은 용접기로 쇠갈고리를 절단한다. 끊어진 쇠갈고리가 튕겨 나간다. 이 쇠갈고리가 이현중의 두개골을 가격했다. 이현중의 머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면서 투쟁 현장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졌다. 다행히도 이현중은 2차례의 수술 끝에 목숨을 구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세원테크 투쟁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연대투쟁이 확대되고, 이에 힘입어 세원테크 노조는 조합원 총단식 투쟁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 직전에 회사와 협상이 타결됐다. 154일간의 파업을 마무리하며 이현중은 현장에 복귀했고, 이해남은 자진 출두 후 집행유예로 다음 해인 2003년에 석방된다.

2003년, 긴 파업도 끝나고 이현중도 일터로 복귀했고, 이해남도 조합원들과 함께했다. 세원테크에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사측은 여전히 똑같았다. 노조와 합의한 것들을 지키지 않았다. 철제 바리케이드도 철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중의 몸은 달랐다. 사고 이후, 2번의 대수술 이후, 머리를 벽에 찧을 정도로 심한 두통에 시달려 일터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일 년여 간을 이런 고통에 시달리던 이현중이 암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선고받은 지 두 달이 되기 전에 이현중은 떠난다(2003년 8월 26일).

2003년, 그 해는 뭔가 달랐다. 이미 새해 벽두부터 손배가압류 철회를 외친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의 죽음이 있었다. 이현중의 장례 투쟁은 전국적인 노동자 연대투쟁에 불을 댕겼다. 그러나 회사는 여전했다. 장례 투쟁이 2달을 넘어가는데도 회사는 꿈쩍도 안 했다. 노조를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 장례 투쟁으로 이해남은 또 수배된다. 이현중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수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이해남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회사에 대한 분노는 갈수록 깊어져 어둡고 슬픈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배 생활 한 달이 조금 지난 때에, 한진중공업의 골리앗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김주익이 죽은 바로 그날에, 이해남은 컴퓨터로 글을 올렸다. ‘현중이와 함께 노동해방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현중이의 한을 풀 때까지 저희 시신을 거두지 마세요.’

며칠 후, 세원테크 본사인 세원정공 앞마당에서 이해남은 분신한다(2003년 10월 23일). 3일 뒤, 비정규직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이용석이 분신한다(2003년 10월 26일). 4일 뒤에, 한진중공업 곽재규가 투신자살한다. 20일 뒤, 이해남은 투병 끝에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조합원들을 두고 끝내 숨을 거둔다(2003년 11월 17일). 한 달 뒤, 이현중과 이해남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 함께 묻힌다(12월 12일, 천안 풍산공원묘원). 너무나 비극적이고 치열했던 열사 정국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다음 해 봄에 세원테크 노조에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 세력은 회사에 9표 차로 진다. 바로 이어서 세원테크 노조는 금속노조에서 탈퇴한다.

세원테크에서 3년간 수차례의 파업과 수많은 연대파업과 2명의 죽음이 있었던, 그 치열했던 민주노조의 시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997년 노동자 총파업을 정점으로 이어진 IMF 위기 이후 계속 자본의 공격에 밀리고 밀리는 노동계급의 슬픈 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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