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어떤 영화의 첫 시사회. 관객들이 소스라치며 뛰쳐나갔고, 한 관객은 영화 때문에 유산이 됐다며 제작사를 고소했다. 감독은 곧장 비난에 휩싸였다. 얼마 가지 않아 헐리우드에서 사라졌다. 주조연 배우 일부도 캐스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영국에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영화'라는 이유로 32년간 상영 금지됐다. 현재에도 미국 일부 지역에선 상영할 수 없다. 1960년대 반문화와 청년문화의 물결 속에서 하위 주체들의 저항을 다룬 작품으로 인용되며 잠깐 빛을 봤지만, 9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논쟁 속에 휩싸여 있다.

1932년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 Freaks>가 그 주인공. <드라큐라>(1931)로 흥행과 대중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던 토드 브라우닝이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서커스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다양한 신체적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프릭쇼 Freak show'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감독이 청년 시절 서커스단에서 일한 터라 프릭쇼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17, 18세기 유럽 귀족들의 오락 중 하나가 '프릭쇼'였다. 유전적 장애와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괴물'이라 부르며 볼거리로 전락시켰는데, 우생학이 득세하던 1930년대에는 아예 서커스와 함께 대중 공연으로 자리잡았다. 그 와중에 처음으로 프릭쇼의 구성원들이 영화화된 것이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의 이미지를 발췌해 '비정상'과 '공포'로 소비하던 종전의 방식이 아니라, 발달장애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영화는 여전히 발달장애인이 집단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유일한 헐리우드 작품이다.

도대체 왜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충격에 빠진 걸까?

간단히 말해 '비정상'이 '정상'으로 역전됐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발달장애인들은 동정적인 시선으로 포착되거나, 혐오의 시선으로 전시되지 않는다. 무대 뒤 일상이 다큐의 필치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손 없는 장애인은 발로 밥을 먹고, 팔다리 없는 장애인도 능숙하게 담배를 피운다. 함께 소풍을 가고, 수다와 저녁을 즐기며, 사랑을 갈망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 우애로 결속된 공동체의 온기가 고스란히 필름에 담겨 있다. 되려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장애인을 조롱하고 돈을 뺏으려고 사기를 치는 비장애인들로 표현돼 있다.

그러니까 정상과 비정상의 위계가 뒤집힌 것이다. 비장애인 관객들은 충격에 빠졌고 영화를 비난했다. 비문명적이다! 다급해진 제작사는 30분을 싹둑 잘라냈다. 장애인들의 평화로운 일상 장면들이었다. 입체적이던 영화는 발달장애인의 복수극으로 앙상해지고 말았다. 또 관객들은 장애인이 못된 비장애인들을 응징하는 엔딩마저 불쾌해했다. 결국 감독의 이력은 끝장났고, 촬영 당시 스타 배우들의 성화로 MGM 스튜디오 바깥에서 밥을 먹었던 발달장애인 배우 대부분은 프릭쇼에서 다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노동이 가능한 신체만을 '정상'으로 표상하는 세계에서 장애인의 삶은 지워지거나, 감춰지거나, '비정상'의 벽장에 감금될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들이 갖가지 특수 효과로 발달장애인 모습을 모방하며 '괴물' 연기를 하는 동안, 정작 발달장애인은 기껏 프릭쇼에서 소비되거나 각종 시설과 벽장에 유폐되기 일쑤다. 영화 <프릭쇼>에서 발달장애인들이 스크린 속으로 태연히 걸어나와 떠들고, 웃고, 파티를 열자마자 비장애인 관객들이 견뎌내지 못한 이유다.

영화가 나온 지 90년이 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애인들이 제발 지하철을 같이 좀 타자고 시위하자 '비문명적'이라고 비난을 가한 이준석이나, 전장연 계정에 욕설 이메일을 천 통이나 보낸 사람들이 과연 1932년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들과 다른 게 있을까? 단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누리고 싶다는 소박한 요청을 하며 광장이라는 스크린에 출연하자마자 '볼모', '다수의 피해',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을 하며 상영 금지를 강제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세상의 모든 '정상'은 배제를 전제한다. 세상의 모든 '다수'는 소수를 배제하고 추방함으로써만 가능한 누추한 강박이요, 폭력의 이데올로기다. 광장에 출연한 장애인에게 혐오를 투척하는 사람들은, 90년 전 영화 속 발달장애인들에게 괴물이라고 소리치던 그 관객들과 정확히 같은 이데올로기를 수행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행복'은 '소수의 최대 불행'이다. 이준석 류의 공리주의는 언제나 주변화된 소수자들의 행복과 고통을 좀파먹는다.

차별금지법도 다르지 않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광장이라는 스크린에 등장해 삶의 존엄과 권리를 재현하는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다수 반대'와 '사회적 합의'라는 근거 없는 미신에 사로잡힌 채 무려 15년 동안 상영 금지를 결정한 민주당에서부터 '다수에 대한 차별'이라는 피켓을 든 기독교인에 이르기까지, 극장에서 비명을 지르던 저 몰지각한 관객들의 검은 입구멍이다.

차별금지법 단식 29일째, 민주당과 집권여당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다수를 빙자한 졸렬한 군상들. 대체 누가 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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