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노동조합이나 사회 운동 단체 안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난다.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노동조합이나 사회 운동 단체엔 특별한 도덕성으로 무장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상 그렇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노동조합이나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사고에 대비하여 우리는 규약이나 그에 상응하는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사용한다. 그러나 규약이나 제도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결해줄 순 없다. 법과 사회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 정의를 위해 힘겹게 다양한 법을 만들어왔고 그런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문제를 법과 제도에 의탁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일까?

그런데 구성원들이 같은 목적과 가치를 지향한다는 집단에서조차 갈등은 왜 일어날까? 개인이 살아온 환경, 정체성, 가치관, 성격, 사고방식, 행동방식 등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다. 같은 목적과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에 속해있어도 그 목적과 가치가 무엇이냐에 대한 생각조차 구성원 모두가 같은 집단은 사실상 없다. 또 집단 내에서 구성원들 각자가 처한 위치, 하는 일, 경험 등에 따라 입장도 생각도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다양한 차이들이 얽히고설켜 상황마다 다른 ‘맥락’이라는 게 생겨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다르다’라고 말해야 할 때 ‘틀리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른 건 틀린 거다. 차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획일적인 교육과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타인의 ‘다름’을 타인의 개성이라고 여기기보다 ‘튄다’고 지적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똑같은 교실, 똑같은 교복, 똑같은 교육과정, 똑같은 시험 속에 경쟁을 강요당하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을 숱하게 들어 왔으니까.

운동 사회라고 다른 것 같진 않다. 이 사회의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운동 사회는 단결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그 단결을 위해선 우리 안의 차이를 지우는 동일성의 강요에 익숙해졌다. 운동 사회 안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도 금기시된다. 내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집단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며, 그것이 집단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차이는 우리의 단결을 해치는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역동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관계와 집단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서로 다른 사람들의 관계가 언제나 아름다울 순 없다. 모든 관계는 때때로 풀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갈등을 수반하니까.

그러나 생각해보자. 두 사람만 모여도 갈등이 생기는 것이 인간사 필연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저마다 다 다른 게 당연하다면,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바로 ‘차이를 견디는 과정’이 아닐까? 너무나 다른 서로를 존중하고, 그 차이들이 빚어내는 맥락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상대방의 ‘사이’를 최적화하면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에 응답하기 위해 서로 조정하고 협상하는 과정 말이다. 마찬가지로 한 집단의 건강함 역시 문제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페미니즘은 이 평화의 가능성을 ‘돌봄 노동’에서 발견해낸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의 감정과 필요를 읽어내면서 그에 응답하는 ‘관계’이고, 좋은 돌봄은 바로 그 ‘관계 역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는 나날이 끔찍하고 저열해지는데 그것을 넘어설 대안 세력은 만들어지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 게임의 법칙만 공정하면 된다는 시대 말이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게임처럼 법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크고 단단한 운동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차이를 견디는 과정’을 살아낼 힘, 다시 말해 ‘관계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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