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톡의 노동자 마음건강
통통톡의 노동자 마음건강

세상에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이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환경과 사람이 그때그때 변하고 있고 수십 년간 해소되지 않은 묵은 감정이 그에 상응하여 준동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와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답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담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떠오르고 그 해결책마저 또렷하게 그려져 설명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을 오히려 자신의 문제 중 하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통통톡의 상담자로서 현장 활동가들을 상담할 때 느끼는 아쉬움 중 하나는 그분들이 상담실을 찾아오는 당시에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활동가들이 상담실을 찾아올 때까지 그분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대표적인 질문으로 ‘나는 왜 이럴까?’와 ‘어떻게 하면 좀 나아질까?’인데, 이 두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다가 지칠만큼 지쳤고, 어떤 위로와 조언도 약발이 다해 불안과 짜증 우울이 번갈아 가며 올라올 때 상담자를 찾게 됩니다. 술이나 여행이 잠시 위안을 주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답이 아니란 심증이 굳어지며 ‘앞으로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답답함이 더해져 있을 때이기도 합니다.

짧게나마 활동가의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상담자는 그분들의 답답함에 쉽게 ‘감염’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은 끊임없이 ‘내가 저 상황을 잘 알지’라고 속삭이곤 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활동가의 세계가 어떤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기에 자신이 한 경험이 조금 평범하지만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사실 그 역시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상담 공부를 시작하였고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지 설명하고 싶은 마음에 입술이 달싹거리게 됩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상담자 코스프레를 한 결과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상담자는 상담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과거 자신이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오다 지친 사람들임을 깊게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고 변신을 시도하다 더 이상 실망하기 싫어 큰마음 먹고 상담실을 찾아온 분들입니다. 섣부른 설명은 더 큰 실망을 마주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신 그 힘든 과정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충분히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고 질문하고, 어떤 사회적 편견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지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정의 상담의 방법을 사용하는 상담자에게 내담자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사회적 편견을 알아차리고, 편견이라 이름 붙이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상담자가 꼭 함께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편견에 뿌리를 둔 부당한 압력은 언제나 사람을 힘들게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 아래에는 늘 부당한 압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버지가 재벌 회장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물컵을 던져도 된다고 놔두면 안 된다고 받아들여지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겠나 싶지만 알아차리고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름 붙이지 못했지만 미래의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리고 있을 또 다른 권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불편함과 부당함으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것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그들이 마주할 새로운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지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리무중 같이 느껴지는 세상을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살아가는 것은 활동가들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입니다.

사회정의 상담은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부당함의 실체를 밝히며 그들과 함께하는 상담의 방법론입니다. 활동가와 상담자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세상과 사람을 돌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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