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주윤발이 한국 SNS를 달궜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그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해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받았고, 그 기자회견 내용이 화제에 올랐다. 8100억원을 사회에 기부한 그는 공을 아내에게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갈 때 빈손으로 가도 상관없다. 나는 매일 흰 밥 두 그릇이면 충분하다.”

전 재산을 기부하고도 ‘흰 밥 두 그릇’의 검약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그는, 뒤이어 매일 연기를 하고 싶다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물씬 과시했다. 

“주름 가득한 늙은이를 연기하라고 해도 기꺼이 하겠다.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늙고 주름지는 것, 이게 인생이지 않나.”

<영웅본색>, <첩혈쌍웅>, <와호장룡> 같은 클래식을 자신의 인생작으로 손꼽는 60대의 주윤발이 그 동안 쌓은 부를 사회에 기증하고 자신의 쭈글쭈글한 얼굴 주름까지 기꺼이 영화의 몫으로 환원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따거’는 영원하다며 열광했다. 예술적 공헌과 사회적 기여를 두루 실천하는 큰 형님으로서의 면모에 새삼 감탄한 것이리라. 흰 쌀밥 말고 잡곡밥도 챙겨 먹고 더 건강하게 살라는 덕담이 날아다녔다. 

그런데 그 열광의 와중에 부산스레 말길에 오른 이가 또 있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 그도 그럴 것이 주윤발이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바로 그 시각, 국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촌 장관 후보자의 두 아들이 아버지 돈을 보태 7억5500만원, 17억6000만원 상당의 아파트를 매입했지만, 증여세 납부 내역을 공개하지 않아 여야간의 말씨름이 한참 벌어지던 차였다. 청문회장에 앉은 유인촌 장관은 턱을 빳빳히 든 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부산에선 홍콩 배우의 ‘검소의 미덕’이, 서울에선 두 번씩이나 장관이 되려는 한국 배우 출신의 ‘노욕의 파노라마’가 이원생중계처럼 동시간에 시연된 셈이었고, 사람들이 자연스레 두 사람의 행보를 비교하게 된 것이다. 어느 모로 봐도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은 베품의 미학이었고, 또 한 사람은 축적과 탐욕의 경제학이었다. 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천상 연기자였고, 또 한 사람은 지난 MB 정부 때 전국민이 들었던 그 유명한 ‘XX 찍지 마’ 욕설을 하지 않았노라 청문회장에서 태연히 거짓 연기를 펼치는 B급 연기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운명적으로 이 두 사람을 가르는 키워드가 있었으니, 바로 ‘블랙리스트’가 그것이다. 주윤발은 블랙리스트 피해자였고, 유인촌 장관은 블랙리스트 시행자였다. 

지난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 때 주윤발, 양조위 등의 배우들이 시위를 지지했다가 중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배우 활동에 지장을 겪었다. 주윤발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이성적이고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만족할 방안을 내놓으면 위기가 끝날 것이다’고 발언했다. 중국 정부는 즉각 블랙리스트를 구성하고 해당 배우들에 대해 중화권 영화와 TV 출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주윤발은 대수롭지 않게 이렇게 대꾸했다. “괜찮다. 돈을 좀 덜 벌면 된다.”

또 2019년 홍콩의 대규모 시위로 ‘복면금지법’에 내려졌을 때도 주윤발은 항의의 표시로 검은색 복장에 마스크를 쓰고 시위에 참여했다. 마스크를 쓸 표현의 자유조차 금지하는 폭정에 대한 항거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에 홍콩 시민들이 ‘따거’를 연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주윤발이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이번 부산 기자회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은 자유일 겁니다. 소재가 넓고, 창작의 자유가 많은 점을 높이 삽니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까지 다룰 수 있어?’ 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주윤발이 한국의 창작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데는 홍콩 영화계의 사정이 자리한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고 토로했다. 시나리오도 사전에 허락 받아야 하고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작비 조달도 어렵게 됐다. 2020년 ‘홍콩국가보안법’이 제정된 후로는 상황이 더 악화됐다. 국가안보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해당 작품의 상영이 원천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이다.  

“많은 홍콩 영화인들이 애쓰고 있지만 검열이 너무 많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이 발언을 놓고도 홍콩 네티즌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가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오를까봐서다. 자칫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에도, 그는 꿋꿋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우산 혁명 때도, 2019년 복면 마스크 시위 때도 아마 같은 갈망이었을 것이다. 사회와 예술의 자유에 대한 그 갈망. 

블랙리스트 피해자였던 주윤발이 그렇게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던 그 시각, 국회 청문회에서는 블랙리스트 시행자였던 유인촌 장관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시대를 거슬러 남을 명언을 발화하고 있었다.  

“나를 반대하는 이들은 문화예술인이 아니라 문화행동가들이다.”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예술인들은 예술인이 아니라 시끄러운 문화행동가들이라는 것이다. 예술인의 정체성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찬반에 따라 결정짓는 희대의 망언이었다. 블랙리스트 시행자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문화예술의 범주에서 제외하겠다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정념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에 대한 지고한 나르시스적 집착이다. 

유장관은 지난 9월 13일 개각 브리핑에서 “청년예술가들이 국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예술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에 방점을 찍는다. 중국 정부가 홍콩 영화계를 탄압하는 구실로 내세우는 바로 그 ‘국가권력’ 말이다. 국가에 봉헌하는 관변 예술을 ‘선별적으로’ 지원 육성하되 비판적인 예술가들은 철저히 배제하는 구조적 블랙리스트를 실행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윤발이 창작의 자유가 구가되는 나라로 부러워하는 이곳 역시, 블랙리스트 유령들과 리바이어던을 꿈꾸는 노욕의 할배들이 완장질이나 하는 아득하게 후진 나라가 되어가는 중이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주윤발의 검소함과 위트가 화제가 됐지만, 사실 그의 말 속엔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회의 자유가 곧 예술의 자유라는 것. 그 자유는 지키내지 않으면 습자지처럼 금방 찢겨진다는 것. 

그렇게 주윤발은 예술의 미래를 걱정하는 예술인이지만, 유인촌은 그저 예술의 미래를 파괴하는 권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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