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농촌은 언제까지 천대를 받아야 할까? 얼마 전 어느 기후 관련 세미나에서도 동어반복의 씁쓸함을 느꼈다. 농어촌 재생에너지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 터였다. 농촌의 태양광과 어촌의 풍력 터빈을 걱정했더니 모 환경연구소의 연구원이 한국 농어촌이 유럽의 농어촌처럼 정부와 협치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어촌을 잠식하는 재생에너지와 녹색전환 갈등 문제를 단지 토지 수용의 ‘절차’ 과정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관점에 따르면, 한국의 농어촌 시민들은 정부와 기업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반발하는 이기적이고 낙후된 인식을 가진 수동적인 주체로 그려진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려는 도시 엘리트들의 숭고한 소명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무지한 존재로 표상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사실관계부터 완전히 틀렸다. 유럽 농민들이 정부와 기업의 녹색전환 기획에 고분고분하게 협력하고 있다는 시각 자체가 여기 동아시아 환경 엘리트들이 녹색 자본주의의 일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공한 망상에 가깝다. 현재 유럽 농민들은 유럽연합의 녹색전환과 재생에너지 전략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2023년 농민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급증했으며, 유럽에서는 녹색전환 관련한 시위가 전년보다 30% 이상 증가했다. 2019년에는 메탄 감축 협약에 항의하는 네덜란드 농부 시위 때문에 역사상 가장 큰 교통체증이 야기됐다. 2022년에는 폴란드와 그리스 농부들이 같은 이유로 트랙터를 타고 수도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또 영국을 위시로, 풍력 터빈과 태양광의 경계를 따라 갈등이 번져나가고 있다. 재생에너지 선도 국가로 칭송되는 노르웨이에서는 사미(Sami)족이 풍력 발전소로부터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국제적 연대 속에서 투쟁을 펼치는 와중이다. 최근에는 그레타 툰베리가 사미족과 연대 투쟁을 벌였다. 

녹색전환을 놓고 번지는 유럽 농촌의 갈등은 영화들로도 기민하게 재현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호평 받은 스페인-프랑스 합작 영화 <짐승들 As Bestas>(2022)은 노르웨이 풍력 기업이 시골 마을에 들어오는 문제를 놓고 친환경 농사를 짓는 이방인 가족과 토착민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서늘한 파국을 담은 스릴러다. 한국 농촌에서와 마찬가지로, 업자의 이간질로 인해 땅을 지키려는 자와 땅을 팔려는 자 사이에 극한 대립이 연출되며 농촌 공동체가 파괴된다. 

지난 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알라카스의 여름 Alcarrás>(2022) 역시 스페인 농촌의 비극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카탈루냐 농촌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던 한 가족이 이곳에 태양광을 설치하려는 세력들과 부딪히며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가뜩이나 정부의 농산물 가격 절하 때문에 암담한 상황에, 그 빈틈을 노리듯 서서히 옥죄어오는 태양광 발전소는 농민들 삶에 질곡의 그늘을 드리운다. 

두 영화가 묘사하듯, ‘유럽의 과수원’이라 불리우던 스페인 농촌의 삶이 점차 형해화되는 형국이다. 교통, 의료 등 필수 서비스 제공이 계속 감소하고 인구도 줄고 있다. 그 대신 재생에너지가 텅 빈 시골 땅을 꿰어차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기후위기에 따른 대가뭄이 스페인 농촌 지역을 강타했는데, 정부에서는 자연 복원을 위해 농업 용수 개발을 금지한다. 우물도 팔 수 없고 습지 물도 이용할 수 없다. 성난 농민들이 물 시위를 벌이는 지경이 됐다. 그리고 이 정치적 공백을 장악한 게 바로 극우정당 VOX다. 프랑코 정부 이후 최대 극우정당으로 단시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의 분노가 연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녹색전환에 따른 농민의 분노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정치 무대에 올린 곳은 네덜란드다. 올 봄, ‘농민당(BBB)’이 지방 선거에서 여당을 차지하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바로 질소 때문이다. 지난 해 가을 뤼테 정부는 2030년까지 질소 감축을 위해 사육 두수를 1/3으로 감축할 것임을 공표했다. 녹색전환을 위해 질소도 감축하고, 2030년까지 생태계 중 최소 20%를 복원하자는 EU의 ‘자연복원법’에 따라 축산 농장을 녹지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곧장 네덜란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매드맥스처럼 트랙터를 몰고 도시로 진격했다. 장관 사택에 오물이 투척되고, 총격 사고가 발생했으며, 트랙터로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등 난리 북새통이 연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마린 르펜 등 전 세계 극우들이 ‘기후 공산주의의 압제’에 맞선다며 네덜란드 농민들을 응원했다. 그 여파에 힘입어 농민당이 지방 선거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해냈고, 뤼테 정부가 몰락했다. 연이어 최근 총선에선 극우정당이 승리하며 세상을 아연케 했는데, 그 당의 총수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작년 농민 시위에 가장 먼저 달려가 연대 연설을 한 정치인이다. 네덜란드 농민들의 분노가 극우 세력과 만나 지핀 횃불은 일국에서만 타오르지 않고 유럽 전역에 불씨를 퍼뜨리고 있다. 벨기에,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의 농민들을 들썩이게 할 뿐만 아니라 극우 세력들에게 정치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스페인의 작은 도시 로스 팔라시오스의 좌파 시장인 마누엘 발레 차콘은 이를 “늑대가 온다”고 표현했다. 유럽 기후정책의 일방적 관철로 인해 농촌이 점차 극우의 온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 것이다. 

유럽의 농부들은 ‘억울하다’고 입을 모은다. 첫째,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산업, 항공, 교통 부문의 온실가스는 단죄하지 않고 가장 먼저 농민과 농삿일을 죄악시한 채 감축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장과 도시에서 온실가스가 더 많이 배출된다. 둘째, 그 동안 기후위기를 감안해 꾸준히 질소를 감축해왔는데 이 모든 노력을 허사로 돌리며 모든 비용을 농부 개인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셋째,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 사람들을 먹여왔는데, 그 전통과 자긍심을 깡그리 짓밟고 또 식량위기에 대한 해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경심은커녕, 그저 유럽의회의 엘리트들에겐 ‘메탄 배출자’, 채식주의자와 동물권 운동가들에게는 ‘동물 학대자’, 환경운동가들에겐 ‘독극물 살포자’로만 악마화된다는 분노다. 

자본주의의 시초축적 이래 토지와 먹거리를 끊임없이 상품화하면서 농촌 공동체를 파괴해왔는데, 이제 기후위기에 당면하니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을 들고 몰려와 또다시 땅을 비워달라는 상황이다. 그 동안 인구가 준다며 농촌에 제공하는 필수 서비스를 야금야금 감축했고, 기후 재정 중 고작 3%만 농촌에 투자해온 터였는데 가장 먼저 기후위기 비용을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에너지만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꾼 채 축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녹색 자본주의가 메탄 감축과 자연복원법으로 농촌과 지역을 재식민화하는 경로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이 분노를 녹색 자본주의를 관철하려는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철저히 무시해왔고, 유럽 좌파들 역시 농민들을 무시해온 그간의 관행을 답습하며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직 극우들만이 농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의 농촌이 극우들의 전초기지로 변모해가는 이유다. 농민들이 무지해서, 또는 이기적이어서 녹색전환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철저히 불평등한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농촌의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담론이 부재하다. 초국적 농식품 자본들로부터 조세를 걷어 전환 기금으로 사용하는 등 농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맵을 정교화하고, 농어민을 전환의 주체로 정치화하는 과정이 존재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자본주의 축적 체제와 성장주의를 생태적이고 민주적인 체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농촌과 남반구는 끊임없이 수탈 당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극우 정치의 만성화를 가져와 기후위기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국 농어촌이 재생에너지 까는데 협치가 잘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모 환경연구소 연구원처럼 우리는 농촌의 소리를 잘 듣지 않는다. 식민지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 ‘농어민당’이 출범했다는 소식도 모를 테고, 기후재난으로 먹거리 농사를 망쳐지고 있다며 함께 대책을 강구하자는 여성 농민들의 한탄도 모를 것이다. 버스편이 없어 마을에 고립된 노인들의 한숨도 듣지 못할 것이고, 논물에 메탄이 많다며 벼농사를 탓하는 자칭 녹색전환 엘리트들 뒷편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웅성거리는 그 분노의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 농촌이 눈에 들어올 때가 고작 재생에너지를 깔 때뿐이라면, 그 세계는 이미 고장난 세계다. 언제든 늑대가 와도 할 말이 없는 세계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