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노조 노동자장으로 포항과 서울에서 동시에

[표시작] 고 하중근 열사 약력 및 사고 이후 경과보고

1962년 7월 10일 대보면 대보리 출생
대보면에서 초중학교 졸업
포항수산업고등학교 졸업
원양어선 선원으로 10여년 생활
1997년 포항건설노조 가입, 10년 동안 포스코 현장에서 일해옴

2006년 7월 16일 포항 형산로터리에서 열린 '건설노동자 투쟁 승리결의대회'에 참석하여 집회대오 맨앞에 서 계시다가 사전경고 없이 갑자기 소화기를 쏘고,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집회장에 난입한 경찰의 집단폭력으로 중상을 입고 동대병원에 입원

2006년 8월 1일 새벽 2시55분 두차례 대수술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상태에 빠져 끝내 운명을 달리 하셨다. 유족으로 81세의 노모와 두분의 형님, 세분의 누님이 계심

<사고 이후 경과>
7월 16일 15:01분 경찰의 집단 폭행으로 중상을 입고, 조합원들의 부축을 받아 동대병원에 입원하셨고, 다발성 외상과 뇌출혈, 뇌부종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짐

7월 17일 두 차례 뇌수술을 받음
7월 18일 대구 동산병원에 이송했으나 회생불능이란 판정을 받고, 다시 동대병원으로 이송

7월 22일 하중근 조합원 사고원인 진상조사단의 조사가 진행

7월 28일 1차 진상조사 결과 발표(민주노총 사무실)

8월 1일 고 하중근 열사 사망

8월 2일 국과수 부검팀, 검사, 감식반, 유족, 진상조사단이 참가한 가운데 부검 실시

8월 3일 서울프레스센타에서 진상조사단 2차 진상조사결과 발표

8월 18일 진상조사단의 목격자 진술 및 현장조사 진행

8월 22일과 23일 유족과 대책위의 경찰청, 국과수 항의 방문

8월 24일 3차 진상조사 결과 발표



[표끝]







9월 6일 10시 서울과 포항에서는 동시에 하중근 열사 추모제가 있었다. 서울은 100여명의 포항건설노동자 상경투쟁단을 중심으로 50여명의 연대인원이 함께한 소규모 추모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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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가량 진행된 추모제는 짧은 추도사들로 이어졌고 건설노동자들은 허망한 죽음 앞에 내내 오열하고 한스러워하며 함께했다. 추모사에서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오늘 우리는 동지를 허망하게 보낼 수 밖에 없지만 이 죽음을 끝까지 부둥켜안고 투쟁할 거이다. 결코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대신해 말했다.
농민을 대표해서 추도사에 나선 문경식 전농 의장은 "작년 두 농민이 돌아가신 이후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자고 다짐했건만 또 억울한 죽음을 보내야 한다. 많은 자책이 든다"며 민중들의 역울한 신세를 아파했고 "반드시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어서 다시는 이 꼴을 보지말자"며 함께 투쟁하자고 주장했다.
이어서 김흥현 전국빈민연합 의장은 "오늘 땅속에 묻어야 하는 것은 한많은 노가다 인생이 아니라 포스코 자본과 폭력정권"이라며 분노했고 고종환 민주노총 서울본부 의장은 "또 동지를 보냈다. 노동자라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세상, 노동할 권리 휴식할 권리를 달라하면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라며 주먹을 움켜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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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추도사로도 한을 풀길이 없는 가운데 포항건설노동자들과 참가한 동지들의 헌화 순서가 있었고 이용식 건설연맹 지도위원의 발언을 끝으로 추모제는 끝을 맺었다.
이용식 지도위원은 "눈물을 닦자 분하고 억울하지만 한숨을 거두자, 이 한을 풀 수 있는 것은 우리 건설노동자 자신들 뿐이다"라고 지쳐가는 포항 선걸노동자들을 격려하며 좌절하지 말고, 다시 조직하고 다시 투쟁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11시경 참가자들은 열사가 생전에 불렀을 노래, 죽기 바로 직전에도 불렀을 노래, '철의 노동자'를 부르며 10보 1배의 행진에 나섰다. 시민들의 관심어린 시선속에 조용히 진행된 10보 1배 행진은 광화문에서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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