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과제들 ‘흥정거리’로 전락, '선진화' 는커녕 ‘독소조항’ 그대로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 등 민주노총을 뺀 5개 단체 대표자가 합의한 것은 절차로도 정당치 않을뿐더러 내용 역시 노동기본권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
9월11일 ‘노사정대표자회의’라는 이름을 빌어 ‘합의안’을 발표했으나, 그간 협상에 참여해왔던 민주노총에는 회의를 한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이는 정부가 노사관계로드맵을 ‘개혁안’이라고 급조해서 발표하고 노사와 교섭을 벌여왔지만 구체적인 ‘개혁방안’ 도출에 실패하자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반대’하는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한국노총을 포섭해 ‘노사정 합의’라는 외피를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한국노총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노동기본권 일체를 포기하는 반노동자적인 뒷거래로 화답한 것이다. 경총 등 사용자단체는 복수노조 유예, 대체근로, 부당해고, 필수공익사업장 확대 등 로드맵에 있던 독소조항을 온전히 지키는 성과를 냈다.
결국 이번 합의는 복수노조 도입은 실익이 없고, 전임자 급여에만 조직의 사활을 건 한국노총이 어용·유령노조를 관리하고 있는 포스코, SK, LG 등 주요 대기업들의 압력에 직면해 ‘일단 복수노조 만큼은 막고 보자’는 입장으로 돌아선 경총과 야합한 것이다.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가 철저하게 자신의 조직 보위를 위해 전체 노동자의 보편적 결사의 권리를 유예시킨 셈이다.
<b>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심각하다.</b> 이른바 ‘911합의안’은 노사관계를 ‘선진화’하기는커녕 당초 정부가 내세운 노사관계 개혁 취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부는 노사관계 정책의 주요 원칙으로 △국제기준에 부합 △중층적 구조의 사회적 파트너십 형성 △자율과 책임의 노사자치주의 확립을 공언해왔다. 이번 합의안은 국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복수노조를 유예시켰으며, 산별교섭 제도화를 외면함으로써 중층적 노사관계 구축은커녕 기업별노사관계를 고착화하고 있다. 특히 공익사업장의 파업권에 과도한 입법적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자율과 책임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지난 2003년 ‘노사관계로드맵’을 급조해서 제출한 뒤,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방안들을 의제화 하기에만 급급해 왔다. 결국 한국 노사관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과제들을 그저 노사 간 흥정거리로 전락시킨 셈이다.
쟁점별로 합의사항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법’으로 막는 나라 어디에도 없다</b>
□ 전임자 급여 3년 유예=조건 없이 3년 유예한다고 하지만,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을 부당노동행위로 보는 현행법은 그대로 유지된 상황이다. 결국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규정은 이후에도 법 개정 때마다 노조의 발목을 잡을 것이 뻔하다. 전 세계적으로 전임자 급여지원을 법으로 금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는 입법적 관여사항이 아니므로 현행 노조법 상의 관련규정을 폐지하라고 수차례 권고한 바 있다.

<b>노동자조직화 원천 봉쇄한 꼴</b>
□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복수노조 제도 도입은 노동조합으로 볼 때 자주적 단결권의 확대를 뜻한다. 결국 현행법의 복수노조 금지는 노조 설립을 법률적으로 심각하게 제약한다는 뜻이다. 상급단체 복수노조를 허용한 뒤 민주노총과 산하 산별연맹 합법화로 이어지면서 민주노조운동의 확대강화로 드러난 바 있다. 기업별 복수노조는 우리의 주체적 대응에 따라서 노조운동의 성장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복수노조를 유예함으로써 향후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될 것으로 전망되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조의 조직화를 가로막게 된다. 또 단위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조의 교섭권 확보는 3년 이후의 일로 미뤄질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10%대에 머무르고 있는 낮은 노조 조직률을 재고할 수 있는 길도 멀어졌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악용한 대기업들이 어용노조나 유령노조를 앞세워 노조 설립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현실도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b>파업권 3중으로 규제</b>
□ 대체근로=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한 대체근로 전면허용은 철회돼야 한다. 쟁의행위란 본래 사용자의 업무를 저해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와 노조가 회사쪽과 대등한 교섭력을 확보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파업기간 중 대체근로를 허용하게 되면 헌법에 보장된 파업권이 유명무실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더구나 현행법도 동일 사업장내에서 파업 미참가자들의 대체근로 투입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신규채용과 하도급을 통해 대체근로을 확대하는 것은 해당 사업장의 쟁의행위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특히 ILO는 파업참가 조합원의 원직복귀를 보장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번 합의안은 신규채용에 의한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있어서 국제 노동기준에 어긋난다. 파업이 끝난 뒤 파업참가자와 신규채용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격화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용자가 적극적인 조합원들을 사업장에서 축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파업을 유도한 뒤 신규 채용하는 식으로 악용할 수도 있다.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한 대체근로 전면허용은 긴급조정권이 빈번히 발동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사실상 공익사업장의 노동기본권을 완벽하게 침해하는 꼴이다. 합의안에 따르면, 필수공익사업장은 최소업무유지 의무가 부과되는 동시에 대체근로가 전면 허용되고, 긴급조정 및 강제중재에 의해 쟁의행위가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3중 규제로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b>규모 늘려 ‘직권중재’만 못해</b>
□ 필수공익사업장 및 직권중재=한국노동법의 대표적 독소조항인 직권중재를 폐지하겠다고 했으나 도리어 필수공익사업장 규모를 터무니없게 늘렸다. 민주노총은 ILO 권고사항을 반영해 (필수)공익사업장에서 철도와 석유를 빼라고 요구해왔는데, 이번 합의안은 반대로 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등을 근거 없이 포함시켰다. 직권중재제도는 ‘현행유지’로 합의된 긴급조정제도로 대체될 뿐이다. 긴급조정제도는 강제중재제도를 포함하고 있어 개정에 따른 변화는 거의 없다. 반면 최소업무유지 의무를 부과해 파업권을 제약하고 있다.

<b>사용자 요구 그대로 벌칙조항 삭제</b>
□ 부당해고=부당해고에 대한 벌칙조항을 삭제했다. 이는 해고제한 규정의 규범력을 약화시켜 사용자들의 부당해고를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부당해고에 대해 실제 형사처벌하는 집행율이 낮은 게 현실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나마 이 규정 때문에 사용자가 해고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 부당노동행위 인정율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조합원에 대한 악의적 해고나 인사처분을 현실적으로 제어하고 있다는 점, 감독관과 검사가 사건처리 과정에서 사실상 사용자의 부담을 고려해 구형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벌칙조항 삭제는 사용자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b>사전통보기간 축소는 생존권 위협</b>
□ 경영상 해고=사전통보기간을 현행 60일에서 30일로 줄였다. 정리해고는 노동자에게 귀책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직장 상실을 감수케 하는 것이므로 그 요건은 엄격해야 하고 특히 절차적 요건은 강화돼야 한다. 그런데도 이번 합의안은 절차적 요건을 도리어 완화했다. 사실상 귀책사유가 없는 노동자가 이직, 또는 실업을 대비해야 하는 현실적인 기간인 사전통보기간을 줄이는 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다.


[표시작]
한국노총, 자본-정부와 합의하기까지
공식회의에서는 ‘노동자편’
‘밀실’에서는 자본과 짝짜꿍

8월26일 노사정대표자회의까지 별도 논의 틀에서 논의키로 한 2개 과제를 뺀 40개 과제 가운데 25개 과제에 대해 의견일치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8대 핵심요구로 제기한 △공무원·교수·교사 노동3권 보장 △비정규노동자 노동3권 보장 △산별교섭 보장과 산별협약 제도화 △직권중재조항 폐지 및 긴급조정제도 요건 강화 △손배가압류 및 업무방해 적용 금지 △고용안정 보장 등에 관해서는 의견 접근이 거의 안 된 상황이었다.
특히 △복수노조하 자율교섭 보장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 폐지 관련해서는 교섭 당사자 각각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9월2일 열린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한국노총과 경총이 돌연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5년 유예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공식 회의가 열리기 직전, 노총-경총 긴급 회동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기타 쟁점사안에 대해서도 대체로 정부 원안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민주노총만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9월4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운영위를 진행했으나, 민주노총은 ‘5년 유예안’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반면, 정부는 내부논의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입장을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9월6일, 노동부는 한국노총, 경총과 지속적인 밀실타협을 진행했다. 재경부까지 포함된 비공개 회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노동부는 분주하게 실국장회의, 산하 기관장회의, 선진화위원 회의 등을 진행했다. 이 날 정부는 한국노총과 경총에 정부원안(전임자는 규모별 제한, 복수노조는 허용 및 창구단일화)과 조건부 1년 유예안(1년 뒤 정부원안), 조건부 3년 유예(3년 뒤 정부원안)를 제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노총은 9월7일 산별대표자회의를 열어 ‘조건없는 3년 유예안’을 받기로 결정하고 이를 노동부에 통보했다.
이어 9월8일부터 10일까지 민주노총을 뺀 5자(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사정위원회, 노동부)간 막후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주요 쟁점은 당연히 전임자 임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3년 뒤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2007년부터 규모별로 제한해 단계적으로 전임자를 축소해서 현재 대비 평균 53%로 맞추는 안 사이에 고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9월11일, ‘노사정대표자회의’까지도 비밀스럽게 진행한 뒤 5자 합의문이 발표됐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모두 ‘조건 없이 3년 유예’키로 합의한 것이다. 기타 쟁점사안도 정부 원안을 중심으로 결론을 맺었다.
[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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