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가 협상을 개시한지 석달만에 벌써 3라운드를 끝내는 초고속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한미FTA는 경제의 지각변동을 넘어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매머드 대외협정인 셈인데 양국은 ‘연내타결’을 겨냥해 걸음을 더욱 재촉하겠다고 한다. 오는 10월23~27일 제주에서 열리는 4차 협상과 12월의 5차협상 말고도 대면회의, 화상회의, 전화회의 등 별도협상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잘 알다시피 내년 6월로 만료되는 미 행정부의 무역촉진권(TPA) 시한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국민의 생사가 달려 있고, 산업의 존망이 걸린 협상을 일곱달 안에 뚝딱 해치우겠다니 졸속도 이런 졸속이 어디 있는가.

‘진전 없는 협상’ 차라리 다행
하긴 지난 10일 막을 내린 3차협상 내용을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도하 언론은 일제히 “핵심쟁점 실질적 진전 없이 끝나”로 헤드라인을 뽑았다. 한국 협상단 김종훈 대표도 이 점을 확인해줬다. 그는 협상기간 기자들을 상대로 협상경과를 브리핑하는데 어느 선까지 밝힐지는 순전히 ‘임자 맘’이다. 기자가 내용을 속속들이 꿰고 있지 못하면 좀체 알맹이를 건지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 8월중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그 동안 밝혔던 것과 견줘 비교적 소상한 1·2차 협상내용을 보고했다. 그 내용과 3차협상 결과를 종합해보면 한미FTA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우선 한미FTA는 원천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외조약의 효력을 국내법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반면 미국은 국내법이 우선하는 법체계를 갖추고 있다. 미국쪽은 이를 무기로 자국법과 충돌하는 한국의 요구에 대해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어서 곤란하다”거나 “의회 인준을 받기가 어렵다”는 방어벽을 치고 있다. 예컨대 외국선박엔 연안 운송권을 주지 않는 해운법을 근거로 상품분야 내국민대우 예외를 요구하는 한편 무역구제조치법을 내세워 대표적 비관세장벽인 반덤핑 규제와 상계관세 철폐(완화)에 난색을 표하고, 섬유 분야에서는 자국법의 ‘원사기준’(Yarn Forward) 규정을 고수하는 식이다.

여기에다 우려했던 대로 미국의 압도적 공세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쪽이 공세를 펴는 분야는 섬유와 무역구제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세부쟁점을 보더라도 미국이 자동차 세제, 약값정책, 지적재산권 제도 등 50여개를 제기한 반면 한국이 제기한 것은 개성공단 제품 한국산 인정 등 20여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중 10여개는 미국이 강력한 방어벽을 치면서 오히려 주도권을 내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고-받기’가 이루어질 경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은 ‘미국형 FTA' 의견접근
사실 한미FTA는 애초 ‘밴텀급과 헤비급의 싸움’으로 불렸고, 성과적 타결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바다 건너 다가오는 광활한 미국시장을 중국보다, 일본보다 먼저 차지하자”는 TV광고처럼 국민의 기대를 부풀리고 조바심을 부추겨왔다. 하나 가진 놈이 상대의 아흔아홉을 탐내 덤빈 꼴인데 이 경우 그 하나마저 빼앗기기 십상이라는 게 상식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3차협상에서 진전이 없었다는 게 외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지적재산권, 환경, 노동, 투자, 서비스 분야에서 주고받기 협상이 진행됐다”는 미국 웬디 커틀러의 발언이다. 요컨대 상품무역 분야에서는 이견이 여전하지만 협정의 핵심이랄 수 있는 투자/서비스 분야에서는 이미 의견접근을 이뤄 미세한 이해 조정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투자/서비스 영역은 1차 협상부터 통합협정문을 작성했고, 특히 투자 분야의 경우 ‘협정상 의무’와 관련해 애초부터 큰 이견이 없었다. 결국 투자자(초국적자본)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노동자·민중에게 고통을 안겨주게 될 내국민대우, 이행의무 부과금지 등의 독소조항이 모조리 협정에 담기게 된 셈이다. 비록 한국쪽이 수용(Expropriation), 투자분쟁과 관련해 이견을 제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최대한 노력했다’는 알리바이용 이상의 의미를 두기 힘든 수준으로 평가된다.

한편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노동장(Labor Chapter)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쪽이 ‘국제노동기준과 별개로 기존 노동법의 노동권 보호 수준의 저하를 금지하자’고 제기했고, 한국쪽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제기준보다 과보호되고 있는 권리는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미국 편들게 하는 노무현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과보호’되고 있는 권리는 무엇이며, 그 동안의 온갖 개악조치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정부는 ‘도둑놈 제 발 저린 격’으로 미국쪽 주장을 수용할 경우 경제자유구역법이 저촉될 수 있다고 자체분석 하고 있다. 나아가 현재 개악이 진행 중인 비정규직 관련법, 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을 의식한 대응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노동자 권리를 희생해서라도 무역경쟁력을 높이고, 외자유치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절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상대국 협상대표를 편들게 만드는 참으로 못난 정권 아닌가.

문제는 노동장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심지어 미국쪽의 주장이 관철되더라도 노동자 권리 보호에는 실효성이 없으리라는 점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경험을 통해 입증됐듯 ‘노동권리 저하 금지’가 명문화되더라도 이것을 구속력 있게 뒷받침할 절차나 수단이 협정에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한미FTA는 상품무역에서 득이 안 되고, 투자/서비스에서는 노동자·민중에게 재앙을 안겨주는 협정이 되리라는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이런 판국에 정부는 ‘대내협상’에 매달리고 있다. ‘미국의 공세수위가 알려진 것보다 그리 높지 않다’며 되레 미국을 두둔하거나 ‘한글본 효력 소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잔꾀’를 부리고 있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재앙을 무릅쓴 협정체결’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협상을 중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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